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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 석 Jan 22. 2024

사람 냄새.

2018년을 떠나보내는 단편소설

2019년의 마지막 날 늦은 아침. 


언제 출발 할지 모르는 어느 마을버스를 탄 채 버스정류장 기점의 고요하고 상쾌한 공기를 마시고 있었다. 그러다 내 시선이 향한 곳은 버스기사의 좌석, 연신 시계를 보던 중년의 버스 기사는 아직 출발 시간이 많이 남았는지 지루한 표정으로 운전석에 붙어있는 거울을 보며 얼마 없는 그의 머리숱을 정돈하고 있었다. 

전형적인 50대 후반의 외모. 사회생활을 하며 받았을 스트레스와 함께 옅어진 머리숱, 현실에 부딪히며 살다 보니 늘어났을 주름살, 한 푼이라도 아끼고 싶어 몇 년이고 다시 꺼내 입었을 낡은 외투가 그가 어떠한 삶을 살아왔을지 조금은 대변해 주는 것 같았다. 


그를 유심히 쳐다보던 나는, 속으로 ‘중년이 되면 멋있게 살아야지’ 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순간. 버스 입구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이 버스 이거는 언제 출발하노?” 

이른 아침부터 막걸리를 한 병 드셨는지, 조금은 홍조가 오른 할아버지 한 분께서 비틀대며 버스에 올랐다. 


“15분 뒤에 출발합니다. 연말이라고 한잔하셨나 보네요 어르신” 

평소에 자주 뵈었던 할아버지인지, 중년의 버스 기사는 반갑게 할아버지를 맞았다.


“내 요 앞에 중리까지 가야 하는데 오늘 하루만 공짜로 좀 태워주면 안되나? 다음에 탈 때는 따블로 줄 테니까!” 


돈이 없음에도 미안한 모습보다는 오히려 당당한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버스 요금으로 쟁여 두었던 천 원의 돈을 막걸리를 드시는 데 사용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12월 말의 추운 날씨에 거동이 불편한 노인이 중리까지 걸어간다는 것은 이론적으로 불가능하기에, 할아버지의 운명에 대해 조금은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아이고- 어르신- 다음에 버스 타실 때 제가 버스 몰지 안 몰지도 모르는데 어찌 따블로 받습니까? 오늘은 그냥 모셔다 드릴테니까 다음에는 꼭 잔돈이라도 챙겨오이소”


할아버지를 보고 웃던 중년의 버스 기사는 낡은 외투에서 더 낡은 지갑을 꺼내 천 원짜리 지폐 한 장과 몇 개의 동전을 돈 통에 던져 넣었다.


“내 돈을 가지고 나온 줄 알았더만 버스 탈라고 보니까 없네! 미안하요! 오늘 내 요 앞에 중리까지 가서····” 


술 때문인지 공짜로 버스를 타는 것 때문인지 더욱 기분이 좋아지신 할아버지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큰 목소리로 오늘 하루 그의 일정에 대해 브리핑 하기 시작했다.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특별하다기보다 조금은 시시하고 일반적인 그런 시골 노인의 이야기였다. 

“아이고- 어르신 연말에 재미있게 노시네요! 부럽습니다. 하하하!” 


귀찮을 만도 했지만 할아버지의 이야기 중간마다 부지런히 대답을 해주던 중년의 버스 기사의 모습에, 버스 출발 시간을 기다리던 지루함은 어느샌가 사라져있었다.


“그거는 그렇고! 이 버스 이거는 언제 출발하노?” 

자신의 장황한 이야기를 늘어놓던 할아버지는 이전에 물었던 질문을 또 물었다.

“11시 55분에 출발하니까 정확히 7분 뒤에 출발합니다. 어르신.” 

기사는 할아버지의 반복 질문에 더 정확하고 상세하게 대답했다. 


더 이상 중년의 버스 기사와 할아버지의 대화에 흥미가 떨어진 나는 버스가 출발하기까지 남은 7분여의 시간 동안 음악이나 듣자는 생각으로 주머니에서 이어폰을 꺼내 귀에 꽂았다. 시끄러웠던 한 바탕의 소동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는지 음악의 볼륨을 크게 키웠고, 휴대폰이 무작위로 재생시킨 김동률의 ‘감사’라

는 곡이 내 귓속을 울려댔다. 


잠시 뒤, 버스 정류장의 고요함을 몰아내는 시끄러운 엔진음과 함께 버스의 시동이 걸렸고, 버스 앞에서 또다시 요란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아이고! 이런 거 안 주셔도 되는데... 한 번이 아니라 열 번은 공짜로 버스 태워드려야겠네! 하하하! 감사합니다. 어르신!” 

중년의 버스 기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할아버지를 보며 큰 소리로 웃고 있었고, 손에는 큰 비닐봉지가 들려 있었다.


“이게 밤고구마라는 건데! 나중에 집에 가서 한번 삶아 무 봐라! 맛있을 거구만! 내 오늘만 이걸로 버스비 대신 합시다!” 

투박하고 취기가 녹아있던 할아버지는 머쓱한지 큰 소리로 웃으며 고구마가 맛있을 것이라는 말을 또 반복하고 반복했다.


음악에 귀를 맡겼던 7분이라는 짧은 시간에, 할아버지는 버스 기사의 배려에 미안하고 고마웠는지 집에 있던 밤고구마가 생각이 났고, 기사에게 묻던 버스 출발시간에 맞춰 집에 있던 밤고구마를 한 봉지 가져오신 모양이었다. 할아버지와 버스 기사는 환한 웃음과 함께 각자의 자리에 앉았고 이내 버스는 차가운 겨울 공기를 가로지르며 출발했다. 


이상하게도 버스 내부는 온기가 돌았다. 도시에서는 잘 느끼지 못했던 사람과 사람 사이의 따스함이 우리의 마음을 데운 것일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특별히 무엇을 하지 않은 나의 2019년 마지막 날은 그렇게 훈훈하게 저물어 가고 있었다. 


여담이지만 할아버지는 목적지에 내리며 중년의 버스 기사에게 큰 목소리로 “다음에 또 봅시다!”라고 인사를 던지고 떠났고, 버스 비 대신 밤고구마 한 봉지를 받았던 중년의 버스 기사는 지금 나와 함께 집에서 그 밤고구마를 먹으며 2019년의 마지막 밤을 보내고 있다. 


언제나 남에게 싫은 말 못하고 자신이 손해를 보며 살아왔던 그의 답답함에 가끔은 불만을 토로하고 언성을 높였던 적이 많지만, 2019년을 마무리하는 오늘은 그의 답답한 삶에 새로운 감정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존재는 언제 어디서나 내게 다양한 방식으로 가르침을 준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더없이 행복한 밤이다. 몇 년의 해가 지나고 나도 중년이 된다면 꼭 아빠처럼 멋있게 살아야지. 



밤고구마 참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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