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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나는 새벽별 Jul 13. 2024

영국으로, 그런데 영어 때문에

생각지도 못했던 정책연구학 석사과정의 시작

#2. 어쩌다 Digital surveillance 2: 영국으로, 그런데 영어 때문에


내가 디지털 감시라는 주제를 나의 박사학위 논문 주제로 선정하게 된 것은 생각지 못했던 수많은 변수들의 조합이었다.


남편, 영국, 석사, 아이엘츠, 코로나19.


그중 가장 중요하고 또 소중한 변수는 나의 구 남친, 현 남편과의 만남일 것이다. 내가 남편을 만났을 당시 그분께서는 이미 영국으로의 유학이 결정되어 있는 상태였다. 둘 다 적지 않은 나이였기 때문에 결혼을 전제로 진지하게 만나고 있었고 장거리 연애도 손사래를 칠 마당에 장거리 결혼(?)은 가당치도 않은 선택지였다. 결국 나도 같이 영국으로 가기로 결정했고 우리는 2018년 5월 결혼을 하고 그해 8월에 함께 영국 브리스톨에 갔다. 첫 해는 남편이 석사를 시작했고 나는 백수의 삶을 선택했다. 풀타임 백수는 아니었던 것이 당시 연세대학교 MBA 과정 마지막 학기였고 졸업 학점을 채우기 위해 그 해 말 한국에 다녀왔어야 했다. 그렇게 두 달 반 남짓의 반백수 시기가 주어졌는데 이때 나는 아주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내가 행복한 시간을 보낸 것과 달리 주변에서는, 심지어 나의 남편까지도 나에 대해 걱정이 많았다. 내가 외국에서 살아본 경험이 전혀 없었던 데다가 여러 가지 상황으로 교환학생이나 어학연수도 해보지 못했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기숙사 생활도 해 본 적 없이 부모님과 쭉 함께 살다가 결혼해서 해외에 나오게 된 케이스였다. 미국에서 몇 년간 지낸 경험이 있는 남편으로서는, 남편이 공부하러 학교에 간 동안 낯선 환경에 놓여 외로워하는 아내, 그래서 벌어지는 갈등과 불화 등을 여러 차례 목격한 적이 있기에 더욱 걱정이 많았다. 하지만 대학 졸업 후 8년을 일하며 이래저래 심신이 지쳐있던 나에게 반백수 생활은 선물과 같은 시간이었고 다행히 영국은 미국과 달리 자동차가 없더라도 도보로 대중교통으로 여기저기 이동이 용이하기에 나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브리스톨 여기저기를 혼자 헤집고 다녔다. 그때, 목적도 정처도 없이 돌아다니며 영국 사람들을 열심히 구경한 것이 영국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물론 정식으로 유학준비를 한 것이 아니었기에 영어라는 한계가 분명했고 특히나 영국식 영어가 전혀 들리지 않는 막막한 시간들도 있었지만, 그 나라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관찰하고 따라 해보는 데는 영어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2018년도 SNS 포스팅인데 지금보니 철딱서니 없어 보이고 부끄럽다. 어쨌든 빛의 속도로 잘 적응했다.


하지만, 준비되지 못한 영어실력은 후에 내 발목을 잡았고 그렇게 잡힌 발목이 묘하게도 새로운 길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2019년 2월, MBA를 졸업하고 영국 박사 진학을 도전했었다. 하지만 논문 작성 없이 졸업할 수 있는 MBA 과정이었기에 박사 입학 면접에서 영국에서 석사를 먼저 할 것을 권유받았고 결국 브리스톨 management (매니지먼트) 석사 과정에 지원해 조건부 입학을 허가받았다. 완전한 입학 허가를 받기 위해서는 아이엘츠 영어시험 점수가 요구되었는데 여러 차례 시험을 보았지만 계속해서 0.5점이 모자랐다. 간혹 근소한 차이는 눈감아 주는 경우가 있어서 학과와 논의해 보았지만 점수를 채우라는 답변뿐이었다. 부끄럽게도 거의 열 번에 달하는 시험을 보았지만 점수가 계속 모자랐고 점수를 채워 비자를 받아 영국에 가려고 한국에 나와있었는데 석사 입학을 포기해야 하나라는 생각에까지 이르렀다. 한국에서 개최된 한 유학박람회에서 만난 학교 직원에게 메일을 보내 상황을 설명하고 입학을 포기해야 하냐고 물으니 이러한 답장이 왔다.


학교 직원에게 받은 메일의 일부. 영국행도 내 인생을 바꿨지만 이 이메일도 지분이 크다



"아이엘츠 시험을 다시 볼 계획이 없다면 현재 점수로 지원할 수 있는 Policy Research (정책연구) 석사 과정도 고려해봐"


"엥?"


메일을 받고 잠시동안 멍하니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정책연구?"


바로 직전에 MBA 과정을 마쳤기 때문에 연속성을 가지고 경영과 관련된 학과에 진학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생각만 하고 있었기 때문에 너무나 뜬금없는 제안이었다. 그렇지만 남편이 있는 영국으로 돌아가려면 별다른 방법이 없었기에 빠르게 정책연구 석사 과정에 재지원을 했고 일주일이 안 되어 조건부가 아닌 진짜 합격 통지를 받게 되었다. 지원을 한 후 곰곰이 생각해 보니 학부를 졸업할 무렵 정책 공부를 해보고 싶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렇다고 해도 정책을 전혀 공부해 본 적도 없고 심지어 MBA 과정을 제외하면 공부한 지도 너무 오래되어 영어로 하는 생소한 분야의 석사 과정을 잘 따라갈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나는 학부 때 의류환경학과 정치외교학을 이중전공하였고 졸업 후 시민사회영역을 취재하는 기자로 1년, 연구소에서 6년을 근무하였다.) 그렇지만 시간은 내 걱정을 신경 쓰지 않기에 9월이 되어 석사과정을 시작하게 되었고 걱정과 달리 정책 공부는 정말 재미있었다. 다만 유학을 진지하게 준비하지 않고 영국에 나온 탓 (그리고 내가 게을렀던 탓에)에 영어 실력 부족하여 고생을 많이 하였다. 도대체 영어로 아카데믹 에세이는 어떻게 작성을 해야 하는 건지, 그도 전에 대체 영어로 글을 어떻게 써야 하는 건지 매 순간이 막막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가 공부한 프로그램을 좀 더 소개하자면-

나는 부족한 아이엘츠 점수로 인해 급 선회하여 입학하게 된 과정이지만 (아, 그런데 보통 지원서를 쓸 때는 이렇게 솔직하게 작성할 수 없고 내가 간절히 희망하여 혹은 선명한 계획 아래 그 과정을 지원한 것으로 작성해야 하기 때문에 이 내용을 공개하는 것이 맞는 결정인지 살짝 머뭇거리게 된다) 같이 입학한 친구들은 굉장한 자부심을 가지는 프로그램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영국에서 Policy Research라는 타이틀을 가지는 유일한 석사 프로그램이었기 때문이다. 보통은 Public Policy (공공정책)이나 Social Policy (사회정책) 등으로 프로그램이 분류되는데 내가 공부한 프로그램은 정책에 대해서만 다루기보다 학생들에게 정책 연구가 어떻게 사회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를 끊임없이 고민하게 하는 프로그램이었다. 그리고  정책을 이해하는 과목뿐만 아니라 정책 연구를 위한 방법론 수업이 상당히 많이 개설되어 있었다. 그중 필수로 들어야 하는 과목들도 있었다. 덕분에 나는 학부 이후 다소 길다고 할 수도 있는 학업에 대한 공백을 빠르게 메울 수 있었고 박사 진학을 위한 기틀을 잘 다질 수 있었다. 방법론 수업을 많이 들어둔 덕분에 박사 과정에 진학해서 방법론 수업을 따로 듣지 않은 것도 소소한 기쁨이었다.


아이엘츠 점수가 채워지지 않을 때는 절망스럽기도 하고 창피하기도 했지만 (게다가 공부로는 원하는 성취를 원만하게 이뤄온 탓에 개인적으로는 충격이 크기도 했다), 오히려 그 덕분에 단기간에 박사과정 진학을 잘 준비할 수 있었고 박사 연구 주제까지도 발견할 수 있었다. 석사 과정 중에도 디지털 감시에 특별히 관심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그 정책'이 발표되기 전까지는.




* 브런치 스토리 운영에 서툴러 두 편의 글을 발행한 후 연재 신청을 하게되어 같은 글을 두 번씩 올리게 되었습니다. 다음주 금요일부터는 새로운 글을 올릴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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