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외편) 고양이수첩
(예전에 쓴, 교정 보는 고양이와 함께 사는 편집자 주인 시리즈입니다.)
“고 군! 나 왔어. 이것 봐, 인터넷으로 주문한 캣타워가 도착했어…….”
“고 군……?”
베란다로 난 창문으로 고 군의 뒷모습이 보였다. 축 쳐진 어깨도.
“아 주인님. 오셨군요…….”
“무슨 일이 있는 거야?”
“아뇨. 그냥 기분이 좀 울적해서요.”
“음. 그렇구나. 나도 오늘 좀 그랬는데. 우리 요 앞에 가서 한잔할까?”
싫다는 고 군을 끌고 집 앞 주점으로 들어갔다. 맥주와 고 군이 좋아하는 감자고로케를 시켜놓고 나는 주절주절 하루의 일과를 털어놓았다. 고 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내 말을 듣고 있었다.
“고 군. 근데 정말 아무 일 없었어?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되지만…….”
“주인님, 실은 아까 마트에 장을 보러 갔다가 예전에 사귀었던 친구를 만났어요.”
“아, 그때 말했던 편사고의 단짝? 헤어질 때 많이 힘들었다고 했던가, 그 친구가 우유부단한 태도를 보여서?”
“네. 그런데 서로 안부 인사를 주고받은 후에 그 친구가 그러더라구요…….”
고 군은 맥주를 한 모금 마신 뒤 말을 이었다.
“미안하다고.”
“뭐가 미안하다는 거야?”
고 군이 물었다. 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나직이 말했다.
“미안해. 지금까지 너를 놔주지 않았던 거……. 다른 사람을 만나고 있으면서도, 나를 잊지 못하는 네게 계속 의지한 거……. 우리 헤어지자고 한 뒤에도 넌 한결같이 나를 믿어주고 내가 부르면 달려오고 내 편이 되어주었잖아.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네가 계속 그렇게 내 곁에 있길, 하는 게 솔직한 심정이었어. 내 말이 얼마나 이기적으로 들리는지 알아. 정말 미안해. 이제 나에 대한 미련을 버려도 돼.”
“왜 지금 와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그렇게 날 힘들게 해놓고?”
“고 군, 정말 미안해. 왜냐하면 이제야 알았기 때문이야. 내가 너와 같은 상황에 놓인 지금에야 네가 얼마나 힘들어했을지 알게 되었거든. 그러니까 이제 미련을 버리고 네가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그 말을 듣고 나서 제가 바보가 된 기분이었어요. 사실 얼마 전까지도 그녀는 힘들 때면 저를 불러냈어요. 헤어졌지만 그렇게라도 인연이 유지되는 것에 대해 저는 일말의 희망을 놓지 않고 있었나 봐요. 그러니까 그녀가 표현하지 않았을 뿐 저에 대한 마음이 남아 있을 거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거예요, 바보처럼…….”
그날 밤 우리는 새벽까지 맥주를 마셨다. 나는 그냥 고 군의 얘기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고 군은 그렇게 좋아하는 고로케는 손도 대지 않고 그냥 맥주만 마셨다. 혹시나 해서 생선까스를 하나 더 주문했지만 역시나 먹지 않았다.
내 등에 업혀 집으로 돌아오면서도 고 군은 연신 “주인님, 죄송해요. 제가 참 바보 같죠” 하고 중얼거렸다.
그날 밤 나는 잠이 오지 않아 뒤척거리다 책상 앞에 앉았다. 그리고 편지를 써서 고양이 수첩에 넣어두었다.
“고 군. 우리는 모두 외로운 바보들이야. 그런 바보들의 외로움을 온전히 지켜봐줄 수 있는 건 신뿐이야. 그리고 우리는 종종 책속에서 그런 신을 만나.
고 군처럼 내가 몇 년간 한 사람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을 때 내 감정을 정리하게 해준 책의 한 부분을 적었어. 고 군에게도 도움이 되길. 그리고 내일은 우리 고로케도 먹자.”
“어째서 당신만 언덕을 내려가는 거지? 불에 타 죽을 셈인가?”
“죽고 싶진 않아요. 하지만 서쪽엔 당신의 집이 있잖아요. 그래서 난 동쪽으로 가요.”
화염 가득한 내 시야에 까만 한 점으로 남은 그녀의 모습을, 내 눈을 찌르는 통증처럼 느끼면 나는 잠을 깼다.
눈꼬리에 눈물이 흘렀다.
내 집이 있는 방향을 향해 걷는 것조차 싫다는 그녀의 말을 이미 난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어떻게 생각하건 상관없다. 하지만 나로서는 이성에 채찍질하여, 나에 대한 그녀의 감정이 싸늘히 식어버렸다고 겉으로는 체념하고 있었다 해도, 그녀의 감정 어딘가에 나를 위한 한 방울이 있으려니 하면서 실제의 그녀와는 무관하게 오직 나 자신 제멋대로 생각하고 싶었다. 그러한 자신을 호되게 냉소하면서도 은밀히 담아두고 싶었다.
그렇지만 이런 꿈을 꾼 걸 보면, 그녀의 마음이 눈곱만치도 내게 없다고 나 자신의 마음 구석구석까지 굳게 믿어버리고 만 것일까.
꿈은 나의 감정이다. 꿈속 그녀의 감정은, 내가 지어낸 그녀의 감정이다. 나의 감정이다. 게다가 꿈에는 감정의 허세나 허영이 없잖은가.
이런 생각에, 나는 쓸쓸했다. - 가와바타 야스나리, 《손바닥 소설》 중 〈불을 향해 가는 그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