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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jung KIM Mar 04. 2023

슬램덩크와 복싱글러브

책에 관한 기분들



 신촌의 한 영화관에서 다섯 명의 남자고등학생들이 팝콘과 콜라를 끼고 울고 있었다. 그 옆에서 나도 마스크가 축축해질 정도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 조조상영관. 둥둥둥둥 오프닝 음악이 깔리며, 스케치로 완성된 인물들이 하나씩 걸어 나올 때부터 그것은 시작됐다.

 

 최근 축구에 취미를 붙인 후배가 함께 하자고 했을 때도 운동신경이 둔하다며 손사래를 쳤었다. 나로 말하자면, 학창 시절 체육대회 때마다 도서관에 숨어 있던 쪽이었다. 활자로 기록된 몽상과 기묘한 꿈과 세계는 손에 만져질 듯 가까운데, 치열한 도전이나 스포츠 같은 단어는 그렇게 생경할 수 없었다. 은근한 성정 탓도 있으리라.

 그런데 슬램덩크 만화책도 보지 않은 나를 사로잡은 그것은 무엇이었는가.

 

 이 정도 나이가 되면 끌려다니지 않을 줄 알았다. 안다, 내가 참으로 오만했다는 거. 이 나이에도 월세를 걱정하고, 커리어를 불안해하다니. 다 접고 귀향하는 생각을 하다니. 가야 할 방향도 알 수 없어 헤매던 이십대의 고민을 다시 할 줄이야... 그렇게 새해를 맞았고, 서점이 침수되는 일이 생겼고, 이런저런 결정을 해야 했다.

 

 책상 앞에 붙어 앉아 번역만 하던 내게 서점 손님이 문자를 보낸 건 그즈음이었다.

 ”열심히 하는 사람들 보는 거 좋아하시는 점장님, 슬램덩크를 보셔야 합니다.“

 평일 아침의 영화관은 예상 외로 열기가 뜨거웠다. 왼쪽 옆에는 고등학생 패거리가, 오른쪽 옆에는 여자아이를 데려온 중년 여성이 앉아 있었다. 그 사이에 농구를 좋아하지도 않고, 떠올릴 추억도 없는 무덤덤한 얼굴의 내가 있었다.

 

 퉁퉁퉁퉁. 코트를 때리는 드리블 소리, 놀랍게도 오프닝 시퀀스부터 극에 끌려들어갔다.

 아... 나는 무얼 놓치며 살았던 거지?

 ”미정 씨는 원하는 걸 자기 걸로 만드는 데 서툰 사람이네요.“

 ”그렇게 바로 포기하지 말아요.“

 그런 비슷한 말을 여러 사람에게서 들었었다.

 문제가 생기면 문제가 없는 곳으로 도망가고 싶어. 다들 그런 거 아냐? 꼭 그렇게 악착같이 살아야...

 그런데 자신을 한번 밀어낸 인생(농구)을 더 강렬하게 붙잡기 위해 스크린 속을 질주하는 그들을 지켜보면서 내 머릿속을 맴돌던 변명들이 문득 지겨워졌다. 내가 놓치고 있던 것은 ”자기 삶을 진두지휘한다는 감각“이었나.

 

 물론 인생은 다음 라운드 진출 여부로 승패가 갈리는 토너먼트가 아니다. 화려한 스포츠 영웅과 달리, 나는 집으로 돌아와 하던 일을 계속해야 한다. 그래도 문제가 없는 곳으로 도망치려던 발걸음을 돌릴 수는 있다.

 <슬램덩크>의 에너지에 이끌려 나는 복싱 글러브와 펀칭백을 샀고(아직 체육관에 갈 용기는 못 냈다), 아침마다 흠씬 펀치를 날린 후 책상 앞에 앉는다. 그리고 조용히 하루의 루틴을 반복한다. 그동안 잊고 있던 묵상과 기도를 재개하고, 벽에 붙은 달력에 하루 작업량을 적는다. 서점에 출근하면 또 다른 일들이 기다리고 있다.(서점 주인은 읽고 싶은 신간들을 먼저 읽는 행운을 누리지만, 책 포장과 택배 발송, CS응대를 하는 시간이 갑절이다.)

 

 <찰리 브라운과 함께한 내 인생>의 저자 찰스 슐츠는 라이너스의 입을 빌려 ”야구는 인생의 축소판“이라고 말한다. 인생의 모든 문제들이 그 안에 들어 있지만 그 아름다움을 맛보는 걸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내게 알려준 건, 인생이라는 농구장에서 도망치지 말라는 메시지다. 언제나 신발끈부터 묶고 도망갈 생각만 하는 나이기에, ‘퉁퉁퉁퉁’ 코트를 때리는 그들의 무모한 에너지가 진심으로 아름다웠다. 이 나이에도 끌려다닌다며 걱정에 빠지기보다, '이 나이에도 기꺼이' 새로운 무모함에 끌려다니고 싶다. 진심으로 그러고 싶다.

 

-스포츠 경기에서 우리가 맞닥뜨리는 도전은 삶의 다른 부분에서 우리가 마주치는 도전에 대한 멋진 풍자가 된다. 볼링 경기에서 패배하거나, 어느 날 밤의 브리지 카드 게임에서 운이 따르지 않거나, 골프 토너먼트의 첫 라운드에서 패하여 다음 라운드 진출에 실패할 때 겪은 절망을 나는 가엾은 찰리 브라운을 통해 표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찰리 브라운은 자기 삶의 어려움을 분석할 때마다 스포츠 용어로 그 상황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었다.

 

-야구 경기를 한다는 것, 내가 투수라는 것, 중요한 건 이거다. 투수로서 그리고 매니저로서 나는 내 삶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사람이 염원하는 것이 아닐까? 이 팀을 지휘하는 게 대단치 않은 일이라고 해도 나는 계속 야구 경기를 사랑할 것이다. 야구에는 다른 스포츠에서 찾아볼 수 없는 아름다움이 있으니까.

 

-야구는 우리가 삶에서 경험하는 문제들을 반영한다.

공포, 외로움, 절망, 실패. 이 모든 것을 야구의 세계에서 이야기할 수 있다. 라이너스가 내게 한 말이 떠오른다. "야구는 인생의 축소판이야." 나는 라이너스를 보면서 말했다.

 "와. 다행이다. 난 그게 인생인 줄 알았지 뭐야.“

_찰스 슐츠, <찰리 브라운과 함께한 내 인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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