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 관한 기분들
물이 왔다. 스님은 그것을 받아 들어 가슴까지 올리고 가만히 료를 응시했다. 청정한 물이라도 되고 불결한 물이라도 된다.
따뜻한 물이나 차라도 괜찮은 것이다. 불결한 물이 아니었던 것은 료에게는 우연한 행운이었다. 잠시 응시하고 있는 동안에 료는 저도 모르게 승려가 들고 있는 물에 정신을 집중했다.
- 모리 오가이, <한산습득>(미시마 유키오의 <문장독본>에서 재인용)
서울행 KTX에 자리를 잡고 미시마 유키오의 <문장독본>을 펼쳤다. 시속 300km로 달리는 열차에서 책 속을 천천히 거니는 독서가 가능하다니 아이러니하다. 발췌한 대목에 이르렀을 때 나는 잠시 호흡을 참을 정도로 몰입해 있었다.
저자는 오가이의 문장에 대해 몇 페이지에 걸쳐 설명한다. 여느 소설가들이 현대의 생활감각으로 덕지덕지 칠한 문장을 쓰는 반면, 모리 오가이는 묘사를 거두고 오히려 오랜 이야기가 가진 힘에 집중함으로써 명쾌함을 얻었다는 말이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문장에 대한 이야기인데 나는 왜 숨을 참을 정도로 몰입했던 걸까. 설명을 하자면 이 책의 내용을 좀 더 이야기해야 한다. 아래 문장은 미시마 유키오가, 모리 오가이의 원문을 흔한 대중 소설가들이 쓰는 방식으로 고쳐 쓴 것이다.
료는 하녀를 불러 막 떠온 물을 그릇에 담아 오라고 명했다. 조금 지나자 하녀는 길고 긴 복도 끝에서도 눈에 띄는 붉은 띠를 가슴 높이에 두른 모습으로, 하녀들이 으레 그렇듯 콩콩거리는 발소리를 내면서 막 길은 물을 그릇에 담아 들고 걸어왔다. 그 물은 하녀의 가슴께에서 찰랑찰랑 흔들리고, 정원의 녹음을 반짝반짝 반사하고 있었을 것이다. 스님은 하녀에게 별로 관심을 보이지도 않은 채, 뭔가 불길한 징조가 느껴지는 눈빛으로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_같은 책에서
그는 이렇게 덧붙인다. “이런 문장은 오가이의 ‘물이 왔다’는 단 한마디와 달리, 현실의 상상, 심리, 작가의 자의적 해석, 독자에 대한 아첨, 성적인 간질거림 같은 여러 가지 요소로 너저분하게 덧칠되어 있다.”
그러니까 문장을 말하는 이 책에서 나는, 삶의 태도를 읽은 것이다. 과다한 정보에 노출된 우리는 그야말로 덕지덕지 칠한 삶을 살고 있다. 유키오의 말을 조금 수정하자면 “현실의 상상, 자아에 붙들려 왜곡된 삶의 이미지, 타인과의 비교 혹은 정상적 삶에 편입하고 싶다는 욕망”이라는 분칠을 멈출 수 없는 것이다.
나 역시 그렇다. 서점 이전을 앞두고 다양한 열린 가능성과 현실적 문제들이 동시에 나를 압박해온다. 그렇다고 굉장히 치열하게 실리를 따져보며 현재를 준비하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뇌의 일정 부분은 쉬지 않고 현실을 재단하는데, 나머지 일부는 그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지나칠 정도로 멍한 상태다.
물이 왔다.
선문답 같지만, 이 네 글자가 내게 말하는 듯하다. 현실의 분칠을 멈추고 본질에 집중하라고. 그렇다면 본질이 무엇인데?
따뜻한 것이든 청정하거나 불결한 것이든, 내가 받아든 그릇 안에 물이 있다는 사실. 그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 물은 시간 혹은 나라는 몸뚱이다. (정신은 잠시 제쳐두자. 생각하고 분석하는 데 익숙한 자아는 많은 경우 나의 추진력에 제동을 건다.)
선문답을 좀 더 이어가자. 지금 이 글을 쓰는 스타벅스의 내 자리에서는 창가 쪽에 앉은 중년의 한 여성이 보인다. 그는 미간에 한껏 진중함을 실을 채 두터운 서류 더미를 들여다보고 있다. 그 서류가 무엇인지 알 수는 없다. 단지, 한 장 한 장 쉬지 않고 점검하는 걸로 미루어 보아, 그의 인생에서 중요한 것인 듯하다. 그의 신중한 응시는 내 마음을 끈다. 거칠게 비교하자면, 나 역시 비슷한 상황에 있기 때문이다.
유키오가 쓴 위의 문장을 읽으면서 내가 그동안 하녀의 움직임과, 물에 반사된 정원의 녹음에 마음을 빼앗기고, 하녀의 콩콩거리는 발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우리의 신경을 분산시키는 묘사들을 걷어내고 나면 무엇이 남을까. 모리 오가이의 문장은 산뜻하고 명쾌하게 내게 말해준다. “물이 왔다”고.
살아가는 방식은 저마다 제각각이다. 대학 시절, 쿤데라의 <불멸>에서 자아의 유일성을 가꾸는 두 가지 방법을 발견했을 때, 내 삶의 방식-아녜스처럼 자신의 본질에 해당되지 않는 것은 하나씩 제하는 방식-이 부정당하지 않는 것 같아 굉장히 기뻤다.
매일 점점 더 많은 얼굴들이 등장하고 그 얼굴들이 날이 갈수록 서로 닮아가는 이 세상에서, 사람이 자아의 독창성을 확인하고 흉내 낼 수 없는 자기만의 유일성을 확신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자아의 유일성을 가꾸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덧셈법과 뺄셈법이다. 아녜스는 자신의 순수한 본질에 다가가기 위해, 자신의 자아에서 외적인 것과 빌려온 것을 모두 추려냈다.(이 경우 연이은 뺄셈 때문에 자아가 0이 되어 버릴 위험이 있다.) 로라의 방법은 정확히 그 반대다. 자신의 자아를 좀 더 잘 보이게 하고, 좀 더 파악하기 쉽게 하고, 좀 더 두텁게 하기 위해서, 그녀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덧붙여 그것에 자기를 동화했다. (이 경우 덧붙은 속성들 때문에, 자아의 본질을 상실해 버릴 위험이 있다.) _밀란 쿤데라, <불멸>
세월이 흘러 사십대가 된 나는 우리 인생이 그처럼 명쾌한 이론으로 정리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인생의 단계마다 덧셈에 끌리는 시기와 뺄셈에 동화되는 시기가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누군가 열심히 자아를 확장시키는 데 열중하고 있다면 그건 그것대로 필요한 일이다.
다만, 지금의 나는 “물이 왔다”라는 문장을 쓰는 태도로 살고 싶다고 생각한다. 분칠을 그만 두고, 내 신경을 분산시키는 세상의 온갖 소리들에서 한 걸음 떨어진 채, “책 속을 천천히 자기 발로 걸었다”던 옛사람처럼 그렇게 말이다. (밤의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