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내내 마음이 울적했어요.”
분주한 서점 공기를 뚫고 카운터 앞에 선 손님이 그 말을 툭 던졌을 때, 나는 번역 마감을 앞두고 정신없이 작업을 하던 중이었다. 나는 속으로 외쳤다. 지금은, 지금은 안 돼요...
내 앞에 있는 그가 일주일을 기다려 이곳에 왔다는 걸 알았다. 마음이 통하는 대화를 기대하면서. 뒤이어 그는 섭섭함이 묻은 얼굴로 힘들었던 속내를 털어놓았다. 나는 “아... 어떡해요...”라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대신 뜨거운 물을 끓여 시나몬 티를 내주며 말했다. “지금 마감이라 좀 여유가 없어서... 미안해요. 천천히 둘러보고 가요.”
서점에 오래 머물던 평소와 달리, 그는 그날 금방 서점을 떠났다.
책방 주인은 언제든 손님에게 열려 있어야 하지 않느냐고 누군가 물을지도 모른다. 아니, 제일 먼저 그 질문을 던진 건 나 자신이었다. 하지만 책방 주인에게도 나름의 사정이 있다. 시간과 정신 모두 여유로운 날들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한 날도 있다.
연희동 밤의서점이 처음 문을 열었을 때 손님 K에게 먼저 마음을 준 적이 있다. 집이 가깝지도 않은데 매일 들러 책을 사주는 그에게 마음이 확 기울어서(물론 함께 나누는 책 이야기도 즐거웠다), 평소답지 않게 마감 후 맥주를 샀다. 그 뒤로 그는 날마다 점장 공간 내 바로 뒤편에 앉아, 작업을 하는 나를 지켜보며 말을 걸었다. 결국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하고 말았다. 점장공간에는 들어오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책방 주인과 손님의 이상적 거리라는 게 존재할까? 그 만남 역시 각자의 사정과 다름을 뚫고 겹쳐지는 순간의 연속일 것이다. 책방을 찾은 손님에게 점장은 가급적 친절하게 응대하는 게 좋겠지만, 조금 가까워진 사이에서는 이쪽의 개인적인 상황도 이해받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이 글을 쓰는 나를 까칠하다 여겨도 어쩔 수 없다.
그렇다고 서점을 찾은 이들에게 내가 늘 거리를 두는 건 아니다. 손님 중 한 명과는 아침 산책을 같이 하는 동네친구가 되었고, 이직과 이사라는 근황을 공유하며 서로를 응원해주는 친구가 된 경우도 있다. 군대를 갔다가 공부를 마쳤다며 논문을 선물해주거나, 외국으로 공부하러 갔다가 돌아와 안부를 전해준 손님도 있다. 서점 근처에 살다가 결혼을 한 커플의 결혼식에 점장들이 참석한 경우들도 있다. 두 번째 밤의서점 자리를 연결해준 것도 그런 오랜 손님이었다.
시간이 흘러도 곁에서 서로의 삶을 지켜봐주는 사람들. 그런 이들과 친구가 되었다.
글을 쓰다 보니 일종의 고백이 되고 말았는데, 나는 친절하고 온화한 밤의점장일 때도 있고, 그렇지 못할 때도 있다. 예전에는 최대한 전자의 모습을 유지하려고 애를 썼다. 그래야 사랑받을 수 있다고 여겼으니까. 하지만 나라는 사람은 고정된 존재가 아님을 서서히 받아들이는 중이다. 모든 인간이 그렇듯 나 역시 ‘안정적이고 고요한 밤’의 얼굴과, 매일같이 감정의 파고를 겪는 복잡한 얼굴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서점에서 만나는 당신과 나의 관계가 앞으로 어떻게 변화될까? 취향과 서비스를 공유하는 관계를 넘어, 각자의 평범함과 연약함, 흠과 결함을 받아들이며 조금씩 단단해져 갈 수 있을까. 그렇게 어쩌다 같은 계절에 서로를 알아보고* 깊어지는 관계가 될 수 있을까. (밤의점장)
“평범해지는 건 즐거운 일이더라고요.” 그는 말했다. “실수할 수 있는 인간, 복잡한 감정과 흠과 결함을 갖고 있는 인간이 되어도 된다는 게 얼마나 안도감을 주는지 몰라요.”
_캐럴라인 냅, <명랑한 은둔자>
* <박하경 여행기>의 ost, 이민휘의 <우린 어쩌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