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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jung KIM May 03. 2018

실패의 역사에 대처하는 법

가끔은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넘겨도 되잖아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말고 대화가 하고 싶어요.”_영화 <렛 더 선샤인 인>
     
 당신이 실패한 역사를 듣는다. 차 한 잔을 사이에 두고, 무참하게 자존심 상한 일을 겪었다며 넘어진 일화를 들려주는데 이래저래 치여 있던 내 마음이 보드라워졌다. 한참을 듣고 나서 나는 웃으며 고백한다.
 “미안, 나 힘이 좀 나는 것 같아요.”
 우리는 함께 킥킥댔다. 그의 능력을 믿고 있기에, 그 실패를 어찌됐든 잘 겪어내고 이제 다소 가벼운 심정으로 내게 털어놓는다는 걸 알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인생의 낙법에 대해 써보겠노라 마음먹은 것은 내가 넘어졌던 일을 부끄러운 기억으로 남겨두지 않고 탈탈 털고 일어나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나도 사람이니까 연달아 넘어지고 나니 힘이 빠졌다. 이러면서 낙법을 알려주겠다니 한심하네 참. 여러 날을 노트북 앞에서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해야 할 일들을 하지 못했다. 나보다 더 힘들 것이 분명한 친구의 손도 잡아주지 못했다. 어깨수술 후 가벼운 우울증을 겪고 있는 엄마의 전화를 고의적으로 피했다.
 사월의 상태는 대략 그러했지만 어쩌겠는가. 나부터 살아야지.
 독일에서 안부를 전해온 친구의 보이스톡을 받고 그때서야 일어날 힘이 생겼다.

 오월을 맞으면서 나는 사월의 나를 나무라지 않고 잘 보내주기로 했다.
 좋은 데 데려가서 맛있는 것도 먹여주고, 이야기하면 힘이 나는 사람과 통화도 실컷 하고, 혼자 바에 가서 앉아 있기도 했다. 호감 가는 사람에겐 표현도 하고, 산책 중에 만난 손님과는 동네를 걸으며 흐릿한 날의 대화를 만끽했다. 인스타 라이브로 낭독을 해보기도 했다. (해보니 재밌어서 점장 추천도서 방식을 바꿔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음 가는 일들을 하는 사이, 뇌 한구석에서 잠자고 있던 기분 좋은 기억들이 하나씩 딸려 나왔다. 한밤중 디종의 기숙사 로비 피아노 앞에 앉아 이야기 나누던 사람이 떠올랐다. 함께 듣던 음악도. 도서관에 있다 머리를 식히려 교내 숲속을 걸으며 맡던 공기의 감촉도 생각났다. 가족에게 큰 일이 생긴 이십대 후반에서 삼십대 초반은 온통 회색빛으로 기억될 뿐이었건만, 대견하게도 온몸으로 바람을 맞으며 잘 버텼었네, 하며 과거의 내가 대견하다는 생각도 뒤늦게 들었다.
 가끔은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한참을 넘어져 있다가 일어나보니 좋았던 기억을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어 있었다. 그럼 그동안 애썼네, 하고 다시 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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