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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쫑 Feb 21. 2023

시니어 업무 능력은 말이 아닌 실체를 보여줘야 한다

회사인턴 생존 일기

    은퇴한 시니어가 내미는 이력서를 보면 경력은 화려하다. 그런데 왜 젊은 친구들은 이 경력을 쳐다보지도 않을까? 작은 기업은 왜 이런 경력을 더 싫어할까? 그건 과거의 경력이라 현실과 동떨어진 게 원인일 수 있지만 그보다는 시니어가 큰 방향만 얘기하지 당장 기업 운영에 필요한 구체적인 실행 방안을 제시할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지금 대표님 회사가 안고 있는 문제는 사업 모델이 시장에 적합지 않다는 거, 소비자들로 부터 외면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회적기업진흥원 소속의 컨설턴트로 컨설팅을 하면서 먼저 기업이나 그들의 비즈니스 모델을 분석해야 했다.

"그럼 어떻게 해야죠 위원님?"

문제를 크게 지적하니 대표도 그럼 문제만 얘기하지 말고 답을 달라며 다그쳤다.

"먼저 마켓을 정확히 분석하는 게 필요한데 4P가 어쩌고 저쩌고, 내적 인프라를 강화해서 어쩌고 저쩌고……"

듣고 있던 대표가 말을 끊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매출을 올릴 수 있다는 거죠? 구체적으로 좀 말씀해 주세요 위원님?"

매출은 허덕이고 서너 명뿐인 직원들 월급 걱정인 회사니 이해는 되지만 당장 답을 달라며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니 당황스럽다.

"온라인 마켓에 진출하는 게 고객 확보가 수월하니 우선 네이버 스마트스토어 입점을 해서 상품을 테스트해 보면서 점점 온라인 마켓을 확대해 가는 방안을 강구해 보시죠?".

이 말은 대화 자리를 더 복잡하게 만들었다. 온라인 마켓이 대세지만 온라인 마켓도 세분화되어 있고 각각의 마켓에 지금 회사가 팔고 있는 상품이 팔린다는 보장도 없다.

"스마트스토어 어떻게 입점해요?""그거 상품 사진도 찍고 편집도 해야죠? 난 그런 거 한 번도 안 해봤는데? 위원님이 좀 가르쳐 주실 수 있어요?"

그러니 마케팅을 담당할 유능한 직원 좀 뽑으세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만한 급여를 지불할 여력이 없는 회사라는 걸 알기에 말을 삼켰다. 여기까지가 컨설턴트가 해 줄 수 있는 전형적인 말이다. 매출을 올리려면 그런 업무가 필요하니 그런 사람을 뽑아라. 시니어 세대가 하는 말투기도 하고. 조직과 자금이 받쳐주는 회사에 근무했던 시니어에게는 이런 말밖에 할 말이 없다. 그러니 하루하루가 고통인 기업은 경력은 화려한데 말만 이렇게 하는 시니어를 환영하지 않는다.


    생존을 걱정하는 기업의 입장에서는 뜬구름 잡는 그런 얘기보다는 '그래서 어떻게 해야 돈을 버는데요?'라는 질문에 구체적인 답을 듣고 싶어 한다. 기업이 시니어 인턴에게 바라는 역량은 큰 그림을 그리는 그런 역량이 아닌 디테일한 전략을 직접 수행할 수 있는 역량이다. 여기서 시니어 업무의 한계가 느껴진다. 은퇴 후 재취업 해서 연봉 4~5천을 받고 일하는 시니어라면 큰 그림을 그리는 자리에서 작은 그림을 그리는 직원(실무자)을 두고 일하면 된다(이런 일자리는 한 개도 없다고 나는 얘기한 적이 있다). 반면에 그 연봉의 반 혹은 반의 반을 받는 시니어 직원(인턴)은 작은 그림을 그리는 직원이어야 한다.

    '큰 그림은 내가 그리고 있으니 당신은 내가 잘 못하는 실무일이나 좀 해 주세요'라며 작은 기업의 대표는 말한다. 요즘 업무들 대부분이 디지털 환경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 시니어 세대를 두렵게 만든다. 디지털 환경 축에 들지도 않는 컴퓨터를 사용한 업무 능력은 기본인 거구. 지금 SNS마케팅으로 매출 올리는 방안을 강구해 보라는 말을 듣는다면 나 조차도 매출 확보에 자신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환경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단순 노동의 시니어 인턴잡에서 일할 수밖에 없는 것도 현실이다.


    기업이 시니어 인턴에게 큰 기대를 하지 않는 것은 시니어 세대에 대한 막연한 생각, 한계적 기대치 때문일 거다. 출근하고 한가하게 업무를 하던 나는 내 능력을 조금은 보여줘야 앞으로 대화도 많아지고 조직에 스며들 거라고 생각했다. 의류 리사이클을 비즈니스 모델로 하는 스타트업 기업이기에 나는 관련된 종합적인 보고서(?)를 작성해 보기로 했다. 나의 직장 생활 경험과 무관치 않고 기업에서 새로운 프로젝트 팀에서 일하며 기획했던 경험이나 퇴직 후 공공기관에 사업제안서를 작성하며 배양된 능력 등이 합쳐지면 회사에 꽤나 도움이 되는 자료를 만들 수 있을 거 같았다. 이런 자료를 만들기 위해서는 온라인상 많은 리서치도 필요하기에 한가한 시간 나의 업무로서도 적격이었다. 이왕 자료를 만들기로 했으니 누구에게 내놔도 손색없는 자료가 되어야 하고 회사에 도움이 되는 자료가 되어야 했다.  

    회사 직원들이 알아야 할 패션의류 교육자료에서 부터 의류리사이클과 패션의류사업의 연관성, 친환경기업 글로벌 트렌드 등을 담은 40여 장의 PPT. 도표와 영상을 첨부하며 기업에 도움이 되는 구체적인 내용을 담아 작성하는데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어떤 날은 하루 종일 자료 작성에 몰입하기도 했다. 자료를 작성하며 느끼는 자부심은 컸다. 자료의 량이 좀 방대했기에 직원들이 자료를 보면 나에 대해 어느 정도 알게 될 거라는 거, 자료를 작성하며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며 직원들이 나를 인정할 거라는 거. 시니어 인턴이 자기의 능력을 입증하기 위해 말로 한다고 누가 믿겠는가? '나 과거에 뭐 했어' '어떤 직장 다녔어' 이렇게 말하는 순간 젊은이들은 '그래서요?' 이런 표정을 지을 테니까.

    나는 몇 번의 수정을 거쳐 완성한 자료를 임원에게 메일로 보냈다. 회사에 도움이 되었으면 해서 작성했다며 어떤 부분은 직원들에게도 도움이 될 거라는 겸손을 떨며. '종건님 자료 정말 좋던데요?' '도움이 많이 돼요 정말로' 몇몇 직원이 나에게 자료 잘 봤다고 건네는 말에 나는 대표가 이 자료를 직원들과 공유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렇게 나는 회사에 나를 알렸다. 40여 장의 PPT는 나의 경험으로만 만들 수 있는 자료는 아니었다. 리서치 자료의 대부분은 최근의 통계 자료를 인용했고 PPT의 구성도 도표와 그림 영상 등을 적절히 활용하여 지루하지 않게 만들었다. 목차별 연계성을 두어 다음 페이지와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읽게 만들었고. 마치 내가 이 자료를 가치 있게 보존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실무에 도움이 되게 구체적으로 만들었다. 자료를 만들며 시니어인 나도 많이 배우고 또 성장한 셈이었다.


    사실 나는 이 자료를 작성하며 회사에 의류리사이클에 대한 솔루션을 제안하지 않았다. 인턴 주제에 쓰기도 뭐하고. 회사는 지금 추진하는 방향도 있고 플랜 B도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회사가 추구하고 있는 비즈니스 모델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진 건 사실이다. 이건 시니어 인턴이지만 내가 회사 직원으로 한발 더 가까이 갔다는 의미기도 하다.

    자원의 재활용에 대해서는 다양한 방법이 나올 수 있다. 나 또한 개인적으로는 의견도 있다. 자료를 작성하며 지구환경의 오염이 갈수록 심각해지는 상황을 알게 되면서 나는 자료가 가치 있는 자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집중해서 만들었다. 의류리사이클 기업이 달성하고자 하는 사회적 가치에 대한 이해도 더 많아졌다. 자료를 다 만들고 최종 검토를 하며 나는 내 폴더에 저장해 오래 보관해도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시니어가 만든 깊이가 있는 자료이기에 그랬다. 시니어 인턴을 마치고 언젠가 나는 목차의 마지막에 suggestion란을 추가하여 내가 생각하는 솔루션을 쓸지도 모른다. 오너가 된 거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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