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먹을수록 입은 닫고 지갑은 열라는 말이 있다. 지갑은 돈이 없으면 열고 싶어도 열 수 없지만 입을 열고 닫는 건 내 의지니 할 수 있지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입을 닫는 게 말처럼 그렇게 쉽지 않다. 입은 자기 절제가 되지 않으면 그냥 열린다. 절제된 말이나 절제된 행동, 이게 우리가 살면서 쉽지 않다는 걸 이미 다 알고 있지 않은가.
'당신 오늘 저녁에 술 많이 먹지 마요. 술 먹으면 말이 많아지는 거 당신은 잘 모르지? 말이 많으면 사람이 실수하게 되어 있어'. 오늘 퇴근 후 부서 회식이 있다는 말에 아내는 인턴이 뭘 그런데까지 참석하려고 하느냐며 아침상에서 잔소리를 늘어놨다. 술이 거나해지면 말이 많아지는 걸 나도 모르는 건 아니다. 술자리를 흥겹게 즐기는 스타일인 나는 재미있는 얘기 하며 즐겁게 마시자는 주의다. 그러다 보니 술이 술을 먹고 말이 많아지고 목소리가 커진다. 하지만 다 젊었을 때 얘기다. 퇴직 후 거나하게 술은 먹은 적이 거의 없다. 2차 3차는 아예 없고. 어떻게 술을 먹든 차분하게 시작한 자리에서 술이 불콰하게 오르면 말이 많아지는 건 사실이다. '그래 오늘 저녁 술자리에서는 한마디도 하지 말자!' 아내의 경고를 맘에 새겼다.
삼겹살에 소맥. 젊은 직원들이지만 역시 회식은 삼겹살인가 보다. 팀장과 직원 그리고 나를 포함 6명. 퇴근 후 삼겹살 집은 예약이 없으면 자리가 없을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 자리를 잡고 않기도 전에 우리는 모두 가게 분위기에 압도당했다. '건배 건배'소리에 '아줌마! 소주 한 병하고 맥주 두병 더요' 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분위기가 이러다 보니 앉자마자 고기가 익기도 전에 잔이 돌기 시작했다.
"종건님 술 좀 하시죠?"
팀장이 건배 제의를 하기 전 말을 건넸다.
"아 네~ 예전에 좀 먹었는데 퇴직 후에는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먹는 거 같습니다"
주량도 내 사생활이니 두리뭉실 말했다. 마라톤으로 단련된 나는 비슷한 나이의 시니어에 비해 술이 약한 건 아니다. 하지만 오늘 나는 인턴으로 참석했다. 그리고 시니어다 보니 술자리도 나이에 맞게 행동해야 했다. 오늘은 한마디도 않기로 작정했다. 술이 한잔씩 내 입에 들어갈 때마다 내 입이 점점 벌어진다는 것, 그 결과가 후회로 온다는 것을 잘 안다. 술자리에서 말이 많아 후회했던 기억을 더듬어 보면 내 의견(혹은 주장)을 강하게 말한다던가 남의 말을 경청하지 않는 거 심지어는 남의 말을 중간에 자르기까지 하는 등의 행동이었다. 그런 때마다 다들 술취했으니깐 뭐 다 똑같은 거지 하며 스스로 위안을 삼고 기억을 지우려 하지만 뒷맛이 개운치 않았던 그런 경험들.
"종건님은 술잔을 꺾네요?"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희진님이 내 잔을 들라는 시늉을 했다.
"요즘 술 많이 안 해요. 저는 천천히 마실게요"
나는 술잔만 부딪히고 테이블에 잔을 내렸다. 분위기를 맞추기 위해 술잔을 들었다 놨다 했지만 잔이 비면 술을 따를 테니 목만 축였다. 그러는 사이 테이블에 소주와 맥주는 쌓여만 갔다.
50대 초 마라톤을 시작하며 나는 3년간 술을 끊은 적 있다. 운동을 위해 끊었다기보다는 회사 생활하며 잦은 술자리로 몸도 찌들고 해서 술 없이 한번 지내보자는 심산으로 그랬다. 그때 술을 전혀 먹지 않고 술자리에 많이 참석했다. 그런 자리에서 나는 '내가 예전에 술 먹으면 저랬나' 하며 술 먹으면 달라지는 사람의 모습을 보고 놀라기도 했다. 사람이 술 취하면 어떻게 변하는지, 무슨 궤변을 그렇게 늘어놓는지, 그리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우기고 서로 좋다고 파안대소하는 모습들을 많이도 봤다.
술병이 쌓이며 분위기도 취기로 쌓여갔다. 역시 안주는 회사 얘기가 최고다. 좋게 시작하던 회사 얘기도 술이 과하면 욕하는 분위기로 바뀐다. 젊은 직원들에게 회사란 운명을 같이 하는 조직은 아니다. 나는 그들의 말에서 그들이 회사에 말하고자 하는 것을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맨 정신이라 그들의 대화가 담고 있는 깊이를 가늠할 수 있었다. 역시 사람은 술자리를 같이 해봐야 하나 보다. '대표는 회사 분위기를 어떻게 알고 있을까?' 일전에 대표가 직원들이 모두 열심이고 능력도 있다고 한 말이 스쳐 지나갔다. 불평이 나쁜 건 아니다. 나는 불평을 합리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불평의 발원이 뭔지를 알려하지 않는 태도가 더 문제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종건님 우리 회사 어떻게 생각해요?"
갑자기 들어온 질문.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이런 질문은 많은 뜻을 내포하고 있어 말 잘못하면 크게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내가 사회 경험이 많으니 하는 질문이지만 이런 회식 자리에서 토론할 내용은 아니다. 오늘 입을 닫기로 했는데 답을 안 할 순 없으니 나는 그저 건성건성으로 말했다
"다들 열심히 일하고 그래서 몇 년 뒤에는 회사가 커져서 상장도 할거 같고 직원들도 스톡옵션 받아 부자 될 거 같아요".
부팀장은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했다고 판단했는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대신 썰렁한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건배를 제청했다 그것도 아주 큰 소리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왜 없겠니 이놈들아!' 나는 속으로 말을 삼켰다. '오늘은 말 안 하기로 아내와 약속했다'. 서로 쳐다보며 말을 많이 하니 불판의 고기를 신경 쓰지 않아 누군가는 계속 불판을 쳐다봐야 했다. 시커멓게 타버린 불판은 교체해야 했고. 오늘은 그 일이 나다. 술도 안 먹고 대화에 적극적으로 끼지 않으니 이 일이라도 해야 술자리에 동참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계속해서 불판에 고기를 얹히고 그 옆으로는 김치를 궜다. 직원들의 말소리가 많아지고 커질수록 나의 손놀림도 빨라졌다. 가게 안의 온갖 소음이 내 손의 불판 집게와 가위의 지휘에 따라 현란한 오케스트라 소리를 내고 있었다.
옆자리 테이블이 하나둘 비어가면서 우리의 시간도 마무리로 가고 있었다. 불판 열기와 술기운에 볼이 벌겋게 달아 오른 직원들을 보니 귀엽다. 술자리 내내 웃는 모습이 보기 좋다. 과한 듯 과하지 않은 술자리가 젊은이들의 자제력을 보여주는 거 같았다. 술 취한 사람은 없었다. 팀장이 그만 일어날 시간이 된 거 같다며 마지막으로 나보고 한 말씀하라고 했다. '나이 먹은 어른에 대한 예의인가' 아니면 '오늘 거의 말을 안 한 나에 대한 마지막 배려인가' 챙겨주는 거 같아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자리 깔아줬다고 꼰대 같은 말로 일장연설하면 그게 안 되는 거야'. 주인공은 나중에 나온다고 우쭐하던 나는 순간 정신을 되찾았다. 그리고 '오늘 저도 즐거웠습니다'며 영혼없는 겸손의 억양으로 한마디 했다.
전철을 타고 집으로 가는 길에 아내에게 카톡을 했다.
"지금 출발. 전철 탐"
"오늘 말 많이 안 함?"
"안 했음"
"진짜? 술 안 먹음?"
"소맥 두 잔만"
"분위기가 어땠어?"
"맨 정신에 듣고 있자니 웃기지 뭐. 한마디도 않고 있으려니깐 답답하데. 내가 들으면 웃기지도 않는데 막 웃고 그래.ㅎㅎ"
"당신 옛날 술 먹었을 때 그 모습이야 뭘. 근데 술자리에서 왕따 당한 거 같은디 ㅋㅋ"
"왕따는 무슨 왕따 젊잖게 듣기만 했지"
"그래도 술 좀 마시고 얘기도 같이 하지 그랬어?"
"아침에는 술 먹지 말고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잔소리 해대더니 지금은 딴소리네"
"ㅋㅋㅋ"
마치 술자리에서 꾹 참고 있었던 말들을 이제는 해야겠다는 듯이 아내에게 카톡으로 쏟아냈다. 답을 하던 아내도 지루해졌는지 답이 뚝 끊겼다. 그래도 나는 카톡에서 열린 입을 닫을 줄 모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