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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쫑 Jun 14. 2024

할머니들의 스마트폰

   수업시간에 가끔 스마트폰이 울리는 경우가 있다. 할머니들에게 급한 일(?)이 있을 있기에 나는 스마트폰을 끄던가 무음으로 하라고 하진 않는다. 대부분은 스마트폰을 전화통화 용도로만 사용하고 있지만 몇몇 할머니는 그래도 일상에서 잘 활용하며 사용하고 있는 듯하다. 잘 사용한다는 의미는 문자나 사진을 받고 보내는 정도를 말한다. 연락처를 저장하고 수정하고 카톡으로 옮기는 것은 잘 못하고.

   수업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울리는 스마트폰 벨소리. 명숙 할머니가 죄송하다며 급하게 전화를 받는다. 병원에서 온 전화라며 스마트폰을 들고 밖으로 나가면서도 허리를 굽혀 죄송하다는 표현을 연신한다. 스마트폰 벨소리가 울리면 다들 책상 한쪽에 있는 핸드폰을 집어든다 습관적으로. 그때 금화 할머니가 던진 한마디.

수업 첫날 가르쳐준 전화번호 저장 안 해놨는디 거기다 좀 써주고 내 꺼에 저장 좀 해줘요, 한다.

그러자 다들 저두요, 저두요. 첫날 가르쳐준 내 전화번호 저장한 할머니는 한 분도 없었다. 갑자기 스마트폰 수업으로 변한다. 중학과정을 마친 할머니들이라 수업 시간이나 별도의 스마트폰 교육 등을 통해 스마트폰 사용법을 배웠다고는 하는데 여전히 섧다.

"배우긴 했는디 워디 기억이 나야 말이지"

"아이구, 난 당최 뭐가뭔지 몰라 그냥 오는 전화만 받어"

몇몇 할머니는 스마트폰에서 글자를 쳐본 적이 없다고 다.


   사실 스마트폰을 활용하여 문자를 익히는 건 매우 유용하다. 나 또한 외국어를 습득할 때 문자로 주고받으며 빠르게 익혔던 기억이 있다. 스마트폰은 글자체를 연습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지만 잘만 활용하면 문자를 통한 읽고 쓰기는 매우 유용한 학습 보조수단이 될 수도 있다.

"워따 선생님 이름 워디다 쓰야 한당께?"

연락처 저장 화면을 열어줬는데 뚫어져라 화면만 쳐다보는 할머니들. 스마트폰에는 어플이 여기저기 산만하게 깔려있다. 내가 연락처를 찾아 입력하는 방법 가르쳐 주려고 스크롤 몇 번 하면 뭐가 없어진다느끼는지 난리다. 자주 보던 화면이 금방 안 나타나면 큰일 났다며 사색이 된다. 뭔 놈의 어플이 그렇게 많이 깔려 있는지 원. 할머니들은 자기도 뭔지 모르는 게 이렇게 많아 헷갈린다고 하는데 어플을 설명하며 정리할 시간은 안되니 급한 대로 오늘 수업에서 연락처를 저장하고 글을 써서 문자 전송하는 법을 가르쳐 주기로 했다. 그리고 카톡에서 친구관리를 클릭하여 연락처의 내 이름이 카톡에 뜨도록 해서 카톡에서 문장을 쓰는 거 까지.

"선생님! 아까 저장했는데 못 찾겄는디?"

"어디서 찾아요? 이름요?"

"아이구, 난 이름만 쓰고 저장한 거 같은디 뒤에 선생님을 붙여야는데 어떻게 고쳐야허지요?"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열댓 분의 스마트폰을 확인하며 설명하자니 등에 땀이 흠뻑이다. 스마트폰 사용에 익숙한 화진할머니는 김종건쌤, 이라고 연락처에 저장하고 이미 나에게 문자를 보냈다.

"쌤, 저희 반 선생님으로 오신 걸 환영합니다" 이렇게.

문자 화면을 닫고 카톡을 열라고 하니 또 여기저기 손을 들며 어디에 있냐고 나를 부른다. 카톡에서 보내고 싶은 사람에게 글 써서 보내기를 해 본다. 하지만 핸드폰의 자판이 익숙지 않아 오타 작열.  스마트폰의 글을 읽다 보면 자판 누르는 게 둔탁해서 생긴 오타하는 걸 짐작할 수 있다. 오타지만 진심을 담은 글이기에 더 아름다운 글이다.


   열기로 가득했던 오늘 수업, 끝나는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그대로 앉아 스마트폰을 매만지고 있다. 해도 모르겠다면 다음시간에 다시 스마트폰으로 수업하자는 귀여운 할머니들. 등에 땀이 흥건한 일대일 스마트폰 교육에 이리저리 뛰느라 더웠기 때문이다. 실내에 에어컨이 있지만 켜지 않는다. 교실 창문을 열고 수업하지만 그래도 덥다. 한낮 밖의 온도는 32도. 내가 에어컨을 틀지 않는 이유는 할머니들은 몸은 약해서 에어컨을 틀면 춥기 때문이다. 글쓰기 수업에서 감안해야 부분은 수업의 환경뿐만이 아니다. 할머니들의 가정사를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다. 문자를 누구에게 제일 먼저 보내고 싶냐고 할머니들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더서너 명의 할머니는 혼자 살고 계신단다. 할아버지가 계신 분도  있고. 의외로 아들, 며느리나 손주들과 함께 사는 할머니가 한분 밖에 없다. 나는 오늘 수업에서 수신자를 정하고 글의 방향을 얘기하는 말이 매우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수신자는 나로 했고 사진을 찍고 보내는 연습을 할 때도 나를 찍으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 폼 좀 잘 잡아봐유"

"와 잘 생겼다 진짜"

맨 앞에 어정쩡하게 서있는 모습을 찍느라 다들 일어나서 난리다. 나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화답한다.

잠시 후 내 카톡에는 어색하게 웃는 나의 모습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아직 안 보낸 할머니 꺼는 할머니 스마트폰에서 내가 나를 찾아 나에게 보내구.


   집에 가는 지하철을 탔다. 스마트폰이 울려 가방에서 꺼내 보니 카톡에 안 읽은 표시가 두 개.

"한드폰 가르쳐 주서서 감사합니다"

"선생님 오늘 잘 못 서 좨송해요"

수업할 때마다 늘 느끼는 건 미안하고 죄송한 건 할머니들이 아니라 오히려 나라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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