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 편
하와이에서 반년,
중미에서 한달, 한국에서 반년.
어느 생계형 직장인이
1년간 놀면서 되찾은
77가지 삶 이야기.
음식에 들어가는 건 양파나 피망 같은 재료만이 아닙니다. 씻고 썰고 삶고 볶고 하는 시간과 노력도 다 재료지요. 몇 년 전 독립하고 제 손으로 직접 요리를 해본 다음에야 만들어준 음식을 먹는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찌개가 짜네 싱겁네, 저번 반찬이 더 맛있네 어쩌네 하는 투정도 그만두게 되었고, 만들어 주는 대로 감사히 먹게 되었지요.
엄마는 요리를 뚝딱뚝딱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고맙다거나 미안하다는 마음이 들지 않았습니다. 똑같이 일하고 들어왔는데도 저녁은 엄마가 차려주는 게 당연하다고 여겼습니다. 누워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으면 어느새 찌개며 나물이며 밥이며 뚝딱 나오니까요. 왜 엄마는 TV를 한자리에서 진득하게 볼 수 없었는지, 왜 계속 들락날락해야 했는지, 따로 살고 나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저도 독립을 하고 한두 달은 요리 좀 해보려고 했습니다. 퇴근길에 양파나 감자 같은 식재료도 사고 레시피도 찾아봤지요. 그런데 집에만 들어서면 마음이 싹 변했습니다. 껍질을 벗기고 씻고 썰고 양념하고 간을 맞추고 도마와 칼을 설거지하고 치울 일을 생각하니 시작하기도 전에 질려버렸달까요. 길어야 20분이면 먹어 치울 저녁 한 끼 만들자고 그 시간과 노력을 쏟을 필요가 있나? 밥상 차리다가 하루 다 끝나겠다 싶었습니다. 결국, 사 온 재료 중에서 햄만 꺼내서 굽는 것이 제 요리의 끝이었어요. 양파, 감자, 대파, 두부는 제 역할을 한 번도 못한 채 썩었지요. 아까운 식재료를 통째로 버리는 일이 반복되면서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어 종국엔 요리와의 연도 끊게 되었습니다. 역시 나는 천성적으로 요리를 못하는 인간이야, 그렇게 결론짓고서 인터넷에서 국과 찌개, 반찬을 주문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와이 생활 초반에도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아침엔 간단히 과일을 먹고 하루 두 끼를 사서 먹었습니다. 그러다 하와이에서 지낸지 세달쯤 되었을 때 생활비도 생활비고 사 먹는 음식이 물리면서 직접 재료를 사서 요리를 하기 시작했지요. 터키샌드위치, 카레, 칠리새우, 버터갈릭새우, 감바스, 생선 무조림, 각종 생선구이, 감자볶음, 연어스테이크, 소고기 스테이크, 오징어볶음, 문어볶음, 계란찜, 아보카도 비빔밥, 샐러드, 계란부추볶음, 삼겹살 두루치기, 참치고추장찌개, 참치감자조림, 옥수수전, 감자짜글이.
손에 익지 않아서 재료를 다듬는 모양새가 어색하고 보통보다 두 세배 품이 들지만, 나란 인간이 만든 것치고는 꽤나 맛있어서 어찌나 놀랍던지요. 일하지 않으니 시간이 많고 시간이 많으니 요리하는 것도 소꿉놀이처럼 재미있더라고요. 어쩌면 지금까지 요리할 마음이 없었던 게 아니라 요리할 시간이 없었던 거 같습니다. 친구를 초대해 제가 만든 음식을 대접하는 일도 서른네 살이 되어서야 처음 해보았네요.
요즘엔 제가 제 자신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정성스러운 일이 요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말 그대로 요리는 '나를 먹여 살리는 일'이잖아요. 그래서 냄새나서 굽기 싫어하던 고등어나 조기도 제 자신에게 잘 구워 먹이고 있습니다. 밥도 전기밥솥이 아닌 압력솥으로 짓고, 찌개의 범위도 점점 넓히고 있고요. 시간이 있을 땐 미리 양념장을 만들어 놓거나 식재료를 다듬어 놓는 요령도 생겼습니다. 누군가가 맛있게 먹어줄 요리를 하는 기쁨도 물론 크겠지요. 하지만 이렇게 남이 아닌, 먼저 나 자신을 위해 기꺼이 요리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 저는 더욱 기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