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 높은 나무들 가운데 빨간 세모 지붕, 살짝 빛이 바랜 듯한 상아색 벽, 십자 모양 창틀의 포근한 집. 불을 지핀 커다란 솥단지에 큼직한 과육과 함께 보글보글 방울을 터뜨리며 끓고 있는 달콤한 잼.
‘잼’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인데 ‘빨간 머리 앤’과 같은 소설이라던지 어릴 적 저녁에 보던 귀여운 애니메이션 만화의 기억이 모여 만들어낸 것이 아닐까 싶다. 현실은 이런 몽글몽글한 경험은커녕 인덕션 위 스테인리스 냄비에서조차 잼을 직접 만들어본 적이 없다. 꼭 한 번 해보고 싶기는 했는데.
본래 잼을 대단히 좋아하지는 않았다. 싫어한 것은 아니었지만 잘 찾아먹지 않고, 있어도 잘 먹지 않았다. 다소 무관심했다는 표현이 적절한 것 같다. 잼과 함께 가장 대표적으로 먹는 음식이 식빵인데 나는 식빵 자체의 순수하고 보들보들한 맛도 충분히 좋아해서 아무것도 바르지 않고 찢어 먹는 일이 많았다. 팬케이크가 있어도 잼보다는 시럽을 부어먹는 편이었다. 잼은 꼭 짝꿍이 필요한 음식이다 보니 그 자체로는 먹을 일이 없었다. 그래서 어린 시절에도 냉장고 안에 꼭 한 병 씩 있기는 했는데 자주 꺼내보지는 않았다.
좋아했던 것이 싫증 나거나 싫어지기는 쉬워도 그 반대는 쉽지 않다. 잼은 그 엄청난 일을 해냈다. 잼에 대한 선호도와 관심이 달라지게 된 계기가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최근의 몇 가지 경험이 영향을 준 것 같다.
집에서 직접 만든 잼을 선물 받는 것은 잼에 대한 소위 ‘로망’을 일깨우기에 충분했다. 처음 받은 것은 커다란 유리병 안에 담긴 블루베리 잼이었다. 불규칙하게 울퉁불퉁 놓인 블루베리의 투박한 모습이 얼른 한 스푼 푹 뜨고 싶은 설렘을 자극했다. 지금까지 먹은 판매용 잼보다는 약간 더 묽었고, 집에서 만든 잼의 최대 장점을 갖춰 과육이 동글동글 살아있었다. 설탕이 엄청나게 들어간 것은 마찬가지인데 왠지 더 건강한 것만 같았다.
딸기는 과육이 더 커서 수제 잼의 매력을 한층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생과일보다 부드러워진 딸기는 익은 복숭아와 비슷한 식감이었다. 갓 구운 토스트 위에 냉장고에서 꺼낸 차가운 딸기잼을 바르고 베어 물면, 따뜻하면서도 바삭하게 씹히는 빵과 차갑고 달콤한 딸기잼의 맛이 동시에 나면서 한 스푼 더 듬뿍 펴 바르고 싶어진다.
팬케이크 가게에서 ‘콩포트’를 자주 접하면서 잼에 대해 좀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작은 소스 그릇에 나오는 콩포트는 양이 적어서인지 더 맛있게 느껴졌고, 콩포트 한 스푼을 올린 팬케이크 조각은 특별한 맛이 났다. 잼과 같은 것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과일을 설탕에 조린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내가 콩포트를 좋아하는구나’ 하는 깨달음은 ‘나는 생각보다 잼과 굉장히 잘 맞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그릭요거트에 잼을 얹어 먹기 시작하면서 잼은 비로소 필수품 목록에 올랐다. 건강을 생각해서 어떻게든 그릭요거트만 먹어보려 했지만 그 자체로 맛이 있어도 여전히 2% 부족한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견과류도 섞어 보고 꿀도 올려 보다가 잼과의 조합이 최고라는 결론을 내렸다. 신맛도 조금 완화되고, 자칫하면 느끼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고소한 맛도 적당해지고 어떤 잼인가에 따라 새롭게 맛있을 수 있으니까. 얼마 전에는 각기 다른 맛의 12종 잼 상자를 주문했다.
잼들의 대표는 딸기잼이라고 생각하지만 요즈음 가장 좋아하는 잼은 ‘애플 시나몬’ 잼이다. 애플파이를 좋아하는 나의 입맛과 취향에 딱 맞는 잼이다. 그릭요거트와도 잘 어울린다.
먹을 때마다 이 잼으로 간단한 애플파이를 해봐야겠다고 결심하지만 아직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식빵 두 장의 테두리를 잘라낸 뒤 버터를 바르고, 한쪽 면 위에 애플 시나몬 잼을 잔뜩 쌓고, 테두리에 계란물을 묻혀 나머지 식빵 한 장과 붙인 뒤 잘 구워내면 그럴듯한 애플파이 맛이 나지 않을까?
요리에 밝지도 않은 데다 상상 속의 레시피는 막상 실제로 해보면 생각지 못한 문제에 봉착할 수 있다는 점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성공 여부는 직접 해본 뒤에 점쳐봐야 할 것 같다. 벌써 ‘그런데 잼을 오븐에 넣어도 되는 건가?’ 하는 의문이 드는 참이다.
잼을 즐기면서도 마음 한 편에는 이렇게 열심히 먹어도 괜찮은가 하는 걱정이 들었는지 저당 잼을 구매해 먹어보기도 했다. 살구잼, 딸기잼, 블루베리잼 등등 여러 종류를 먹어봤는데 결국 그냥 먹고 싶은 잼을 적당량 먹자는 결론을 내렸다. 맛이 없지는 않았지만 본래 잼에서 느꼈던 만족감을 얻기는 역부족이었다.
언젠가는 원하는 만큼 과일을 아낌없이 넣고 입맛에 딱 맞는 잼을 만들어 봐야지. 막 끓인 잼을 빵에 듬뿍 발라 먹고, 나머지는 열탕 소독한 깨끗한 유리병에 넣어 하얀 종이로 덮고 노끈으로 묶어 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