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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lieyr Sep 01. 2017

시작되고 끝났던 순간은 같았다.

따지고 보면 연민이었다. 주기적으로 만나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이제 막 시작하는 연인처럼 맛집 탐방에 열을 올리던 때가 있었다. 유난히 더웠던 여름날 그것도 오후 4시 반. 주말마다 지방에서 올라오는 그를 위한 단순한 시간적 배려이자 우리가 암묵적으로 동의했던 가장 편한 시간이었다. 토요일 오후 4시 반. 득달같이 보고 싶어서 만나는 시간도 아닌 그렇다고 시간 때우자고 만나기엔 너무 이른 시간. 첫 만남도, 마지막 만남도 4시 반이었다. 나는 운동과 인간관계 유지를 빙자한 약속들이 있었고, 밤 운전이 힘들다고 했던 그는 항상 새벽에 올라와서 차를 놓자마자 나와의 약속 장소에 나왔다. 

그러한 약속이 몇 번, 하지만 일과 중 하나로 정착하기에는 조금 일렀던, 그 시기의 한남동이었다. 블루스퀘어에서 구름다리를 건넌 골목 아래에 있는 식당이었다. 오픈 시간에 맞춰 30분 일찍 와서 기다리고 있다는 문자를 받고, 멀리 살기에 빨리 오게 되는 것인지 나와의 약속을 늦지 않기 위함이었을지, 이상하게 마음이 설레었다.  그를 만나러 갈 때마다 자기 차례가 됐다는 듯이 꼭 나오는 그 음악을 들으며 다다랐을 때, 식당 밖 몇 기다리는 사람들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는 내가 걸어가는 방향으로 등을 지고 앉아있었다. 키가 작다 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유난히 등이 동그랬다. 동그마니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아마 처음으로 마음이 움직였었나 보다. 과거 상대가 체격이 멋있어서, 똑똑해서 좋아해 본 적은 많았다. 거의 대부분이 그랬다. 그런데 아, 저기 그 사람이 동그랗게 오도마니 앉아있구나 라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을 때, 그때가 그런, 무엇인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전혀 남성적인 매력이 아닌데 무슨 기괴한 일인지. 

그의 옆에 털썩 앉자 그가 날 돌아보았다. 그날따라 렌즈를 안 낀 동그란 안경. 웃음이 터질 뻔했다.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만나면서도 가끔 그 등 생각이 났었다. 처음으로 이 남자의 손을 잡거나, 어깨를 안아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더랬다.

헤어짐의 순간에서 말로 확인사살을 해서 그렇지, 사실 그 모습과 분위기 자체가 그의 우울함이 총집된 모습이었다. 나에게 보이기 싫어서 의도적으로 일주일에 한 번만 만났던 사실, 혼자만의 시간을 파고들며 기분이 컨트롤이 안될 때 가끔 우울증 억제 성분이 들은 약을 찾게 된다는 얘기를 듣고도 그다지 충격을 받지 않았던 것은 내가 이미 그를 오래전부터 이상한 사람이 아닌 연민으로 받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이지 않나 싶다. 

바람 펴서 헤어졌던 첫 사람의 멱살을 잡거나 뺨을 후려치고 싶었던 순간들이 셀 수도 없이 많았다. 그때 미처 다 퍼붓지 못한 말이 억울해 몇 년간 발목을 잡았던 기억이 새삼 괴로워, 어떻게 해서든 헤어짐의 순간에서 할 말 다하고 미련을 남기지 않고자 치열하게 고민했다. 내가 하고 싶은 말, 해야 하는 말! 

하지만 그저 우리의 시간이 너의 영혼에 어떠한 위로도 되지 못하여서 안타깝다는 말을 했다. 그런데 충분했다. 뭐가 더 필요한가. 너는 너 자신을 고독함과 우울함에서 꺼낼 수 있는 사람을 앞에 두고, 네가 그리도 기도하고 염원한다는 남들과 같이 행복한 삶을 가능하게 해줄 사람을 만났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이것을 버릴 정도로 자신을 싫어하는데. 내가 거기서 널 어떻게 꺼낼 수 있겠어. 

새카맣게 흘러가던 물줄기가 더욱 짙어지자 그만 일어나자 했다. 더 센티멘탈하게 앉아 있을 줄 알았는지 그의 눈이 똥그래졌다. 그만 가자. 1년 넘게 도저히 넘어설 수 없을 것만 같아 답답하고 희한했던 그 마음의 벽이 헤어짐의 순간에서 반말과 함께 허물어졌다. 우리가 계속 존댓말을 썼고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고 그로 인해 더뎠는데, 이런 순간이 돼서야 그 경계가 무너지는구나. 그럼 여기가 정말 이 관계의 종착역인 거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공원에서 나와 집 방향으로 오면서 손에 들린, 이 얼음 다 녹아 무거워진 음료를 어디에 버려야 하나 만 고민이 됐다. 병 음료를 마셨던 그의 손에 들린 봉지는 그가 걸을 때마다 달그락거렸다. 그 조차도 안쓰러웠다. 별 것도 아닌걸로도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사람. 

집까지 갈 필요도 없었다. 횡단보도를 지나 몸을 돌려 웃었다. 난 이제 갈게. 

벤치에서 일어나 횡단보도에 올 때까지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않았나 보다. 아주 이상하게 일그러져 있는 얼굴을 보니 흡사 헤어짐을 당한 사람 같았다. 처음으로 가감 없이 나의 본능대로 말이 나왔다. 표정이 왜 그래?

그는 울음을 터트렸다. 아, 저 얼굴, 나의 울던 얼굴이었다. 처음 본 그의 울음이 터진 얼굴은 내가 울 때 짓는 얼굴과 같았다. 마지막이 돼서야 너와 나는 정말 많이 닮았었구나. 하지만 난 너와 달리 행복해지고 싶어. 너의 우울함을 안아주고 싶지만 같이 끌려가기엔 나도 나를 사랑한다. 

오빠가 왜 우는 거냐며 손을 뻗자 그는 알아들을 수 없는 어떤 말을 얼버무리며 도망갔다. 머리로는 더는 만나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세상에서 제일 나쁜 남자의 말을 자기가 해놓고, 도망가는 모습을 나에게 보이면 너무 치사한 것 아닌가. 허둥지둥 가는 뒷모습을 가만히 서서 쳐다보다가, 나도 그만 몸을 돌려 집으로 향했다. 발걸음 하나하나 내딛을 때마다 생각했다. 그 생각의 끝은 그의 뒷모습이었다. 내가 끝까지 너의 뒷모습을 보게 되었다. 처음 시작도, 끝도 너는 내게 등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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