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현주 Aug 29. 2020

글이 써진 이유

유년 기억을 짜내어

어린이 때 글짓기 대회 상을 꽤나 많이 탔는데 이상하게 원고지 몇 장 채우면 상을 주셨다. 선생님들은 "어떻게 이런 단어를 아느냐?" 물으셨는데 왜인지는 설명을 못했지만 '좋은' 단어를 쓰면 글이 멋지다는 막연한 생각을 했다. 그 단어를 공급해 준건 아버지가 사다 쌓아놓은 책이었다. 아버지는 지적으로 보이고 싶어 하는 남자로 말이 길었다. 한번 시작하면 알도 못할 단어로 공자왈 맹자왈 하며 당신이 학교 선생 출신임을 온몸으로 뿜고 싶어 했다.

50년 전 어떻게 그 많은 책이 배달됐을까 문득 궁금하다. 소포가 발달한 것도 아니고 도시 변두리 골목 전전하는 가난한 책장이 어떻게 채워졌을까? 가끔 얻은 단서로 내 부모의 삶을 조각 맞춰 보면 아마 번듯하게 살 때, 아버지 교무실에 드나들던 할부 책 장사의 마케팅에 넘어간 것이다. 백과사전이 6권짜리, 12권짜리가 있었고, 50권 세계 전래동화,  창작동화, 세계 여행기, 전기문 등등 대부분 통일된 디자인의 커버였던 걸로 보아 당신이 서점에 가서 고뇌하며 고른 게 아닌 전집이었다. 분명 누군가 책을 사라고 했고 아버지는 거절을 못한 것이다. 그렇게 딱히 지적이거나 교육적이지 않은 이유로 구입된 책을 시도 때도 없이 읽은 게 나였. 그래서 나는 또래보다 어휘를 많이 알았다. 그게 글이 쉽게 써진 이유 첫째.


그러면 나는 왜 시도 때도 없이 책을 읽었을까? 이번에는 엄마에게 원인을 돌려야 한다. 내 엄마는 여장부였다. 60~70년대 연립주택을 짓고 2, 3층 건물을 짓는 험한 직업여성을 미화시키면 그렇다. 본시 엄청난 부잣집 딸인데 시대의 비극으로 빈곤층이 된 드라마의 실제 사람. 살려고 일어섰다 도로 주저앉았을 때가 나의 초등시절이고,  유년의 기억이 거기가 제일 큰데 그때 하필 가난의 골목으로 나를 데려가신 거다. 비록 여기 살아도 내 자식은 이 동네 것이 아니라는 강한 자존심 때문에 내가 동네 애들과 어울리는 걸 싫어했다. 천방지축 오빠는 동네 원주민이 돼 인생을 즐겼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 어린 동생을 끼고 집에 있으면서 책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게 글 쓰는 게 쉬웠던 이유 둘째.


이미 별명이 홍 박사였다. 백과사전을 넘기도 또 넘기며 눈에 띄는 페이지를 읽어댔으니까. 태극기에 대해 조사해 오라는 숙제에 "건 곤 감 이" 써갔더니, "빨강은 북한, 파랑은 남한"이라고 써온 반 애들에 비해 박사논문이었다. 진짜 박사가 된 건 그로부터 30년 후. 백과사전은 내게 서구문화를 흠모하게 했다. 국 배우들 사진이며, 유럽 건축물 사진은 위대한 세상이 어딘가에 있다고 상상하게 했다. 그걸 이해한 바탕에는 번역된 외국동화에 나오는 이국적 발음의 지명, 음식과 사람 이름에 대한 배경지식이 있어서였다. 그로부터 30년 후 나는 서양인 미국에 가서 살았다.


이후로도 내내 글을 쓰고 있다. 텍스트는 내게 말을 건다.  어휘 하나가 삐죽 내밀며 자기 자리 아니므로 바꾸라 하거나, 어떤  데에서는 읽기 숨이 가쁘니 문장을 자르라 한다. 글은 톡톡 튀다가 조용히 내려앉았다가 다시 휘몰아치기도 한다. 어휘 사이에 리듬이 있고 행간에는 멜로디가 있다. 내가 얼마나 아는 가를 표현하고자 시작했지만 나오는 리듬과 멜로디에 아는 걸 조금 얹어야 글이다. 그렇게 수십 년 문장을 쪼개거나 잇고 있다. 어휘를 꽂고 연결사를 붙이고 쉼표를 옮기고 마침표를 찍는다.  그걸 글쓰기라 한다면 쓰고 있다.

작가의 이전글 불안 3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