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ad to CEO - 이왕이면 꿈을 갖고 가자
한창 술이라면 자다가도 뛰쳐나가던 시절, 술 좀 먹는다는 사람들이 귀하게 여기는 술은 지금처럼 탄닌과 바디감이 있는 와인이나 세계의 유명한 맥주가 아닌 우리가 아는 최고의 서양의 술은 양주라고 불리던 위스키였다. 궁정동 안가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죽기 전에 먹었다던 시바스 리갈 12년이 당시에는 해외 출장을 다녀오거나 처음으로 예비 처갓집에 인사를 갈 때나 가져가던, 먹기보다는 선물의 용도로 쓰이는 귀한 술이었다. 당연히 가격도 비싸고 수입도 많이 안되던 시절이라 남대문에 있는 도깨비시장에서 미군 PX에서 나온 술을 찾았지만 진짜인지 아닌지는 먹어 본 경험이 많지 않은 관계로 파는 사람만 알 뿐, 사는 사람은 직접 마실 술이 아니기 때문에 알 수가 없었다.
사실 시바스 리갈은 박 대통령이 죽기 전에는 대중에게 많이 알려진 술이 아니고 한국에는 미군에서 흘러나온 조니워커가 양주의 대명사였다. 조니워커, 시바스 리갈을 거쳐 소득이 늘고 양주의 수입이 자유롭게 된 후에 나온 술이 밸런타인 12년이었다. 후에 높은 양반들이 좋아하는 술이 밸런타인 30년이라는 사실이 알려진 이후에 처갓집에 가는 선물은 시바스 리갈 12년에서 밸런타인 30년으로 격이 높아졌고, 해외 출장에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밸런타인 30년이 동이 나는 경우도 왕왕 생기곤 했다.
집에 있는 날 가끔 입이 궁금하면 배가 나왔다고 핀잔을 주는 와이프의 시선을 피해 부엌 찬장을 뒤지다 보면 한편에 마치 퇴락한 명문가의 양반가처럼 오래되었지만 기품을 잃지 않은 밸런타인 30년을 볼 수가 있다. 지난 세월의 흔적을 가리는 세련된 옷차림처럼 포장지와 리본까지 달고 한쪽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다. 정확한 기억은 없으나 받은 지 아마도 10년은 더 되었스리라. 처음 상무이사가 되어 하루 종일 일만 해도 힘들지 않았던 시절에 멘토였던 분이 나에게 생일 선물로 주었던, 그리고 꼭 대표이사가 되면 이 술로 축하를 하겠다던 포부를 가슴에 새기며 깊숙한 곳에 놓아두었던 밸런타인 30년이 이제 세월이 흘러 밸런타인 40년은 족히 되었지만 아직도 마개는 불구하고 포장조차 건드리지 못하고 있다.
승진을 거듭하던 시절에는 금방이라도 진한 위스키 스트레이트를 마시면 자축하는 날이 올 것만 같았지만, 막상 이루고 나니 더 큰 목표를 설정해야 할 것 같은 일 중독증에 감히 손을 못 대고 있다. 이 술로 축배를 들면 새롭게 성취해야 하는 것이 없어질 것 같은 불안감에서 남은 삶을 더 풍요롭게 할 것 같은 부적으로 밸런타인 40년을 만들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