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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영 Jul 11. 2021

1인 자율 생활자

프롤로그

만나면 서로 얼굴을 바라보아야 했던 시절, 딱히 주제 없이 시작한 대화였지만 일부러 끝날 시간도 정하진 않았다. 술잔이 돌면 어느덧 서로 맞장구를 치기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목소리가 높아졌지만 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말을 이어갔다. 저마다 할 이야기가 많았고 또 저마다 들어줄 여유가 있었다. 


무엇보다 대화의 소재에 돈의 냄새가 묻어 있지 않았다. 돌이켜 보면 대부분 연애나 사랑에 관한 이야기였다. 사모나 연정 아니면 어긋남 혹은 일방적인 무엇들에 대해서 얼굴 붉혀가며 열변을 토하기도 했고 어느덧 나지막이 ‘나도 그랬어’ 하며 고백의 장이 되기도 했다. 


인생이 각기 서로의 길로 나뉘기 전. 출발선상에 있던 우리들은 짐짓 세상을 다 아는 것처럼 목에 힘을 주기도 했지만 돌이켜보면 그랬다. 우리는 현실을 제대로 모르는 철부지였거나 말만 할 줄 아는 허풍쟁이들. 그럼에도 숱하게 나눴던 그때의 대화들은 그 자체로는 별다른 의미는 없었을지라도 귀가 시간을 잊게 할 정도로 재미가 있었고 소통이란 말이 어색하지 않은 순간들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우리는 서로 말을 한다. 하지만 같은 말을 하면서도 서로가 다른 말을 하는 느낌을 받는다. 얼굴을 마주 보지도 않는다. 각자 또 다른 세계와 연결된 스마트폰을 통해 지금 같이 있는 상대를 놔두고 또 다른 먼 곳의 누군가와 메시지를 주고받는다. 


이야기의 주제도 겉돌기가 일쑤다. 쉽게 목소리가 높아지지 않지만 또 목소리의 열기 또한 달아오르지도 않는다. 의례적인 이야기가 마치 본심 인양 오고 가다가 결국 대화의 주제는 돈으로 귀결한다. 부를 축적하는 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 여러 가지 효용과 이익, 편리와 권력은 생존의 차원에서 허투루 여길 수 없는 것들이다. 현실에 맞지 않는 이른바 꿈같은 이야기가 가진 허망함을 알기에 굳이 화제를 돌리지 않는다. 


누군가는 이러한 상황이 오히려 편하고 유익하다고 여긴다. 어차피 세상은 내 가족과 내 가족 아닌 이로 나뉜다. 내 가족이 우선이다. 내 가족의 안위를 지키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은 경제적인 넉넉함을 확보하는 일이다.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고 남편이 되고 아버지가 되거나 혹은 아내와 어머니가 되는 삶은 가족의 안위를 전제로 한다. 가족의 안위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이야기들이 지닌 쓸모없음을 아는 나이가 됐다. 


점점 일상적으로 쓰는 어휘에서 감정이나 감성을 담아낸 단어들의 횟수가 줄어들고 여태껏 그런 단어를 쓰는 이들을 만나면 불편하거나 약간은 한심하고 안타깝다. 잠시만 긴장의 끈을 놓쳐도 일순간 몰락할 수 있는 사회라는 걸 가족의 안위가 소중해질수록 뼈에 사무치기 때문이다. 감정과 감성이 묻어 있는 단어들, 젊을 때 마음속의 열기를 불어넣었던 단어들은 경쟁의 엄혹함을 잊게 만드는 환각제와 같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젊은 시절 막힘없이 말했던 자신을 부정하며 점점 입을 닫는다. 


차츰 누군가와 만나서 할 말이 없어지고 있다. 마흔이 되니 자연스럽게 주변에 기혼자들이 많아졌고 기혼자와 미혼자 사이에는 공감대보다 공감대 아닌 영역이 더 크게 자리 잡고 있다. 누구의 남편이나 아내가 아닌 그저 당신 자체와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그것은 또 내 욕심. 결혼으로 달라진 생활. 속으로 삭힌 일이 많아 또 할 말이 많아졌을 거라고 짐작하지만 결혼으로 바뀐 여러 역할이 결국 당신의 청춘을 잠식했기에 당신의 대화가 전보다 생기를 잃었다. 나 또한 책임지는 관계 바깥에서 보낸 시간이 길기에 세상모르는 소리를 한다. 같은 처지의 미혼자를 만나면 또 벽을 느낀다. 어찌 보면 그들과 나는 서로 닮아서 저어하다.       


그래서 대화의 상대는 나 자신으로 좁혀진다. 자신과 대화를 할수록 또 자신의 부족함이 보이고 난망해지는 경우가 잦다. 자칫하면 우울증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하지만 그 길을 천천히 살펴 조금씩 걷다 보면 그동안 몰랐던 누군가를 만나고 개별적 존재의 깊이와 세상의 인연을 자연스럽게 음미한다. 그 누군가의 이름을 흔히 ‘혼자’라고 부른다. 


혼자 대화를 나누는 시간은 적적하면서도 내밀하고 외로우면서 자유롭다. 많은 말이 오가지 않아도 통하는 게 있다. 혼자는 타인과 단 둘이 있을 때, 여럿이 있을 때 만나면 그 모습이 달라져 있다. 타인의 시선 앞에서 나는 나를 속이기도 하고 남을 속이기도 한다. 


그럴 때 혼자가 느끼는 고독과 불통, 불안, 위선, 기만 등은 스스로의 본모습을 정확히 아는 것을 방해한다. 때문에 ‘혼자’는 홀로 있을 때 만나는 것이 바람직하다. 거기서부터 실은 인류의 오랜 지혜와 삶의 성찰이 비롯되었다. 공자와 맹자 같은 유교의 성인도, 부처와 예수 같은 다른 종교의 성인들 역시 ‘혼자’ 있음을 중요시했던 건 다 이유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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