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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영 May 10. 2023

집사라는 호칭 외에는

독신 공감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나 고양이를 마치 자식처럼 여기는 지인들이 주변에 더러 있었다. 동물을 싫어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키우고 싶을 정도로 좋아하지도 않았다. 부모님도 다른 어린 생명에 애정을 기울이시기엔 아들 둘만으로도 일상이 벅차셨을 것이다. 나와 동생도 어렸을 적 동물을 키우겠다고 부모님께 투정을 부려본 적이 없다. 


이렇다보니 사람도 아닌 동물을 서슴없이 ‘우리 집 막둥이’라 부르며 반려동물을 자랑하는 주변 지인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대부분 ‘영혼 없는 맞장구’로 대응해왔다. 하지만 시큰둥한 반응에도 반려동물을 키우는 지인들은 아랑곳 하지 않고 스마트폰에 담긴 강아지와 고양이 사진을 보여주며 동물과의 교감을 상세하게 전했다. 반려동물과 함께하는 일상 덕분에 삶 자체가 달라졌다며 마치 선교사 같은 열의로 내게 반려동물 키우기를 전도하는 이들도 있었다. 


사람은 배신해도 동물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말은 너무 흔했다. 살면서 이해타산에 찌들어버린 인간과의 관계보다 동물과의 교감이 더 순수할지니 강아지나 고양이에게 정신의 안정과 위안을 찾는 게 더 낫다는 고백도 들었다. 영혼의 반쪽을 굳이 인간에게서만 찾지 말라며 사람에게 소울메이트는 오히려 동물일 가능성이 크다는 증언도 있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반려동물에 비교 당하고 있는 그 분들의 반려자들을 떠올려보기도 했다. 그들은 주로 남편이라 불리는 반려자들이었다.


몇 해 전 이별을 경험한 후에는 꽤 오래 결혼할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마음이 허해진 순간 반려동물을 키우던 지인들의 전도 효과가 살아나기 시작했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던 그들의 숱한 간증들이 마음속에 묘연의 씨앗을 뿌려놨던 것이다.  


사실 반려동물을 키우기로 결심한 가장 큰 이유는 생명에 대한 책임이 어떤 느낌인지, 다른 생명을 부양하고 먹여 살리는 게 어떤 무게인지 대리 체험해보고 싶어서였다. 혼자 있다고 해서 절절하게 외롭거나 심심해하지 않는 성격이라 많이 고민했다. 반려동물을 키우면 아무래도 주말이나 휴가 때 어디를 가더라도 혼자 살 때처럼 훌쩍 다녀올 수 없을 테니까. 그런데 특히 식구에 대한 책임을 늦어도 사십 대에는 감당해봐야 한다는 내면의 목소리가 크게 들렸다. 성인이 되어 나 외에는 책임을 지지 않는 삶의 얄팍함이 슬슬 콤플렉스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식구의 끼니를 걱정하지 않고 떠드는 내 이야기들이 조금은 공허하게 느껴졌다. 


바로 반려동물을 입양하지는 않고 2년 정도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며 강아지보다는 고양이를 키우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고양이 카페에 가서 나와 고양이가 잘 어울리는지 살펴보기도 했다. 동네 길고양이들을 찾아 먹이도 챙겨주며 한시적이지만 ‘캣대디’ 역할도 해봤다. 마음의 준비를 마치고 유기된 고양이를 입양해 키우고자 여러 입양 사이트를 들락거리다가 송이와 묘연이 닿았다. 한국 나이로 마흔 셋에 1인 1묘 가구가 되었다. 지금 함께 살고 있는 고양이 송이는 페르시안 친칠라라는 품종묘다. 


송이는 고질적인 피부병이 있어 지속적으로 약을 먹여야 하고 정기적으로 병원에 가야 한다. 새벽에 우는 바람에 잠을 설친 적도 여러 번이다. 주말 아침 늦잠을 자려해도 녀석이 야옹거리는 소리에 깨어 밥을 차려줘야 한다. 여행이나 출장을 갈 때 녀석을 돌봐야 할 사람이나 거처를 구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고양이 나름대로 의사소통을 위해 곧잘 야옹거리는 데 그 울음소리가 언제나 정겹지도 않다. 꼬리를 보면 고양이 기분을 알 수 있다고는 하지만 녀석이 먼저 내 기분을 먼저 헤아려주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송이가 어느덧 식구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같이 밥을 먹는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식구라는 개념처럼 같은 식탁에 앉아 밥을 먹지는 않지만, 녀석의 밥을 내가 챙겨주니 넓은 의미에서 우리는 식구가 맞다. 식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 일을 하는 삶. 녀석 덕분에 10분의 1 정도는 체험하고 있다. 송이를 키우기 시작하면서 식구를 부양하고 사는 이들의 삶을 조금은 더 이해할 수 있었다. 젊은 날의 부모님 인생에 한층 더 존경심이 일었다.  


송이가 언제까지 나와 함께 살지는 모르겠지만 녀석을 ‘우리 집 막내’ 혹은 ‘우리 집 막둥이’로 여기면서도 너무 애지중지하지 않으려고 노력 중이다.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들은 고양이가 막내나 막둥이가 아니라 상전임을 알고 있다. 그들은 스스로 주인집 시중을 드는 ‘집사’라고 할 만큼 고양이를 떠받든다. 만물의 영장을 자처하는 인간으로서 탐탁지 않은 표현이지만 고양이와 함께 살아갈수록 그 표현 외에는 적당한 호칭을 찾지는 못하겠다.  


송이. 사진/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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