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독신 공감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월영 Nov 05. 2023

나의 자기계발 방법이기도 하니까

[독신공감]

1.


모처럼 취재 차 잠실에 왔다. 그새 또 많이 변해 있었다. 올림픽 공원 앞. 차로 바라다 주었던 처자 분의 집은 이제 텅텅 빈 아파트가 됐다. 재개발에 들어가서다. 담당 분야가 부동산 쪽이다보니 오고 가며 보이는 우선순위가 죄다 아파트다. 내가 바래짐을 당하진 않았어도 꽤 많이 바라다 주었다. 잠실 오니까 생각난다. 지금은 바뀐 신천 주공아파트와 가락시영, 장미 아파트 등등 또 어디가 있었더라. 잠실 시영도 있었던 거 같은데 이제 그 처자들의 얼굴은 떠오르지 않고 그저 어렴풋하다. 


그리고 분당에서 다시 자기 동네인 잠실로 돌아올 거라던 옛 애인도 떠오른다. 이는 가을과 동네가 어울려 청승의 상승작용을 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 시절 바라는 대로 시간이 흘러갔더라면 이 동네로 퇴근했을 지도 모른다. 그런 면에서 나는 괜한 고집이 있었고 그 사람은 내 정서가 의아했을 것이다. 헤어진 인연의 후일담을 계속 꺼내는 건 참 싱겁고 부질없는 일이지만 그때 마음 속 사연들이 쌓이고 쌓여 자연스럽게 발효가 되다보니 뭔가 억제하기 힘들다. 해서 간간히 이렇게 피식 피식 부풀어진 그 청승들의 기운을 뺀다. 그러기에 적당한 계절이고 날씨고 또 시간이다. 


2.


아마도 전화를 하면 "어이 친구 어인 일인가" 하며 반갑게 받아줄 녀석과 "어 오랜만이다. 연락좀 해라 임마"하고 반가운 목소리를 들려줄 오랜 친구 두 명이 잠실에서 일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전화를 하지 않고 퇴근할 것이다. 두 명 모두 가족을 꾸렸기에 평일 저녁 예고 없는 약속을 잡아 술잔을 기울이고 퇴근하기엔 그저 편하지만 않다는 걸 알아서다. 두 녀석이 이 글을 볼 일은 아마도 만무하겠지만 그래서 또 적는다. 네들 가정을 위해 내가 간혹 기도한다고. 


두 명 모두 세례명이 있는 녀석들이다. 실바노 형제와 아드리아노 형제. 두 명 모두 군대 갈 때 내가 환송을 해주었고 또 면회도 갔었다. 두 녀석은 모두 내가 연락을 안 해도 간혹 술 마시고 전화해 안부를 묻던 녀석들이었고. 남녀 간의 애정의 깊이는 잘 모르더라도 친구 간 우정의 담담함은 녀석들 덕분에 안다. 그런 담담함이야말로 서로가 서로를 과거에 메몰시키지 않는 관계의 바탕일 것이다. 보고 싶다고 말하는 건 낯간지럽고 그저 건강들 하셔라. 


3.


나는 무엇을 바라며 살고 있을까? 부모님으로부터 분가했지만 일가를 이루지 않았기에 나는 피붙이를 위해 산다는 절박함의 강도가 덜하다. 부모님과 동생만이 가장 가까운 염려의 선 안에 들어와 있다. 가족을 이룬 이들은 그 염려의 선 안에 챙겨야 할 생명이 나 보다 많을 것이다. 아 그러고 보니 송이가 빠졌구나. 송이도 내 염려의 자장 난에서 손에 꼽는 존재. 그래봤자 다섯 손가락이면 셈하기 충분하다. 


다시 무엇을 바라는 가로 돌아갔을 때. 세속적인 부를 많이 누리고 싶다는 욕심은 크지 않다. 남들의 로또 당첨이나 집값 폭등 소식에 마음의 잔물결이 일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게 파도가 되어 나를 덥치진 않는다. 딱히 비교를 하지 않고 자란 덕이라고 생각한다. 비슷한 수준의 사람들 속에서 다들 엇비슷한 모습으로 자랐다. 결핍이 없다고 할 순 없어도 그 결핍이 마음의 심연을 파내어 쭉정이처럼 자리진 않았다. 


그래서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곳에 왔을 때 느끼는 딱히 부러움이 덜한지도 모르겠다. 오히려 불편한 지점도 있다. 이런 물질의 번영과 편리와 화려함이 문명의 혜택임과 동시에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 자체를 일정부분 잠식하고 있어서다. 또 이 풍요의 밑에는 경쟁과 경쟁이 경쟁으로 얽혀 경쟁의 톱니바퀴를 굴리고 있고 그 톱니바퀴 바깥에 숱한 상처와 소외가 있다는 것도 알아서다. 


그럼에도 지금 이처럼 도시, 인공의 것들과 그 인공의 공간 속에서 편리와 평안과 여유를 누리고 있는 사람들의 표정이 주는 안온함과 안정감. 또 온갖 타인의 개별적 시간들이 흐르면서 축적중인 이 시대의 일상적 행복을 외면할 수 없고 거부할 수 없다. 나도 그것을 내심 만끽하고 있어서다. 이렇게 잔뜩 상념으로 덧칠하고 있는 내 마음의 질문은 그래서 단순하다. 나는 도시의 편리와 문명을 거부할 수 있는가. 실은 여기에 내 취재 영역의 본질이기도 하다. 건설과 부동산. 도시를 전제로 한 영역. 그 도시의 앞에 서 있는 이곳은 내가 인지하지 못했던 걸음걸음 사이에 얼마나 많은 정보와 감상과 신호들을 주입시켰을까. 그 반응들이 아마도 이런 글이고 텍스트들이겠지만. 


4.


일을 잘하고 싶다는 마음은 투철하지 않으나 못한다는 평가를 받고 싶지도 않다. 그래서 내 목표는 늘 B플러스. 하지만 사회는 일에서 다들 A를 원하고 바란다. 완급을 조절하며 잘 해야 할 것만 잘하자는 사람은 A가 될 수 없다. 모든 걸 잘해야 A고 그 중에서 더 잘해야 S다. 업무 평가가 그렇다. 결국 업무 평가는 샐러리맨들에게 내일의 희망이거나 낙담이고 대개는 오늘의 딱 견딜만한 고문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여전히 조직부적응이고 쓸데없는 생각이 많은 조직원이다. 요즘 그 쓸데없는 생각이 업무에 지장을 주는 게 아닌가 자문자답을 종종 한다. 쓸데없는 생각은 상상력을 발휘해야 하는 직종에서는 나름 인정을 받고 있지만 숫자가 중요한 실물영역. 이익과 손해로 명확히 나뉘는 영역에서는 권하지 않는 것들이다. 버티고 버틴다는 말이 다시 나를 위한 주문이 되고 있다. 


5.


상념의 흐름들을 이렇게 글로 정리하지 않으면 그 상념들은 저마다 부유하고 엉키어 일상의 비효율을 유도한다. 그 비효율은 우울로 빠지는 지름길. 기사를 쓰는 뇌의 영역과 이렇게 내 일상을 정리하는 영역은 갈수록 명확히 구분이 되어 두 가지가 동시에 돌아가지 않는다. 나이가 먹어서다. 그 나이는 앞으로 계속 들어가겠지만 나이와 별개로 내 상념들의 싱싱함은 변하지 않으면 좋겠다. 그 시들지 않으려는 상념이 어쩌면 내가 지금까지 가장 꾸준하게 실천해온 나의 자기계발이기도 하니까. 

매거진의 이전글 후배가 나보다 나은 길을 걸을 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