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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독신 공감

성숙한 이들의 연애는 이 때 마지막 빛을 발한다

독신공감

by 월영


아. 저도 그 영화 좋아하는데요. 그 영화 개봉 했을 때 1만 명도 안 봤을 걸요. 맞아요. 그 영화 광화문 씨네큐브에서만 단독 개봉했었죠. 가서 보셨나요? 네 제가 보러 갔을 때 극장에 다섯 명 정도 밖에 없었어요. 그렇다면 혹시 그 영화도 보셨나요? 네 그거 부산영화제에서 봤었죠. 정말요? 저도 그거 부산영화제때 봤었거든요. 그럼 그 영화는 보셨나요? 거기에 그 배우가 또 나오잖아요. 어? 그 배우 좋아하세요? 네. 눈빛에 독특한 움직임이 있어요. 맞아요. 그 영화에서 특히 그랬죠. 눈동자 떨리는 연기는 그 배우가 최고일거에요. 신기하네요. 저랑 좋아하는 영화나 배우가 비슷하신 분 거의 못 봤는데. 근데 그 영화는 원작이 더 낫죠. 저도 동감입니다. 원작이 지닌 긴장감이 영화에서는 많이 약해 졌더라구요.

처음에는 그렇다. 생면부지의 남녀가 만나 서로 ‘연애’의 관계를 타진하며 아직은 짐짓 무심한 척 이야기를 나눌 때, 혹시나 저 사람도 내가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은연중에 생긴다. 이런 시점에서 부담 없이 꺼낼 수 있는 대화 소재가 영화나 드라마, 음악, 책 같은 개인의 문화적, 지적 취향을 대리 증명할 수 있는 것들이다. 연애란 아직 상대와 함께 한 공간에서 살아야 하는 상황을 구체적으로 계산하며 이해타산을 따지지 않아도 되는 시기니까.


달리 말하면 남자가 하루에 서 너 시간 이상 모니터 안을 배회하며 좀비들을 난자하고 있는 게임 중독자인지, 동화 백설공주에 나오는 계모 왕비인양 셀카야 셀카야 하며 늘 자신의 외모를 확인하는 여자인지를 파악하지 못해도 된다는 것이다. 자리에 앉으면 무의식적으로 콧구멍을 쑤시는 버릇이 있는지, 발바닥 뒷꿈치에 각질이 있는지, 어제 신은 양말을 또 신는다든지, 일 년 동안 칫솔을 바꾸지 않고 쓰는 지 등등 그 개인의 실질적이고 적나라한 일상의 무엇을 모른다 하더라도 좋아하는 게 같다면 호감이 생긴다.


그 호감은 상대와 내가 같이 좋아하는 것의 가짓수가 많아질수록 비래해 늘어난다. 특히 대중적인 취향과 다소 거리가 있는 자신만의 영화와 드라마와 음악과 책의 리스트를 가지고 있는 사람일수록 ‘서로 좋아하는 것’이 같은 상대에게 마음의 문을 개방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연애는 그 문과 문 사이를 자유롭게 오고갈 수 있는 일종의 열쇠를 의미한다. 자신이 외우고 있는 영화 속 대사를 상대도 외우고 있거나 그 장면을 단 몇 마디로 설명해도 알아들었을 때, 자신만 알고 있는 노래라 생각했던 곡이 후렴구를 상대도 흥얼거릴 때 자신도 모르게 상대의 눈을 그윽하게 바라보다 별안간 입술이 닿을 수도 있다.


하지만 좋아하는 영화나 드라마나 책이나 음악이 같다고 시작한 연애 관계가 마냥 순탄하게 흘러가며 하나의 길로 합쳐지기란 쉽지 않다. 문화적, 지적 취향의 일치여부는 호감의 문을 열고 연애를 시작하는 데 기여하더라도 서로의 신뢰를 좌지우지하기에는 힘이 종종 부친다. 서로 좋아하는 것이 같을 때 느끼는 가까움 보다 싫어하는 것이 다를 때 느끼는 거리감이 감정에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해서다. 감정도 근육과 비슷해 내 몸 가까이 당기는 힘보다는 내 몸 바깥으로 밀어내는 힘이 더 크다.


그래서 성숙한 이들은 대개 좋아하는 게 같은 걸 계기로 연애를 시작하더라도 서서히 서로 싫어하는 게 무엇인지를 확인하며 그 관계의 미래를 점친다. 여기서 싫어하는 무엇은 음식이나 취미 같은 것 보다는 사람의 태도, 인생관이나 정치적 견해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가치관이다. 내가 싫어하는 태도와 가치관으로 상처를 받거나 분노할 때, 싫어하는 것이 같은 이라면 공감하고 위로하고 기꺼이 내 편이 되어줄 수 있다.


이 때 생기는 마음이 신뢰다. 설레고 끌리고 보고 싶고 만지고 싶은 욕구가 좌불안석하는 기간을 지나 한층 깊고 튼튼하고 안정적인 관계로 진행하기 위해서 필요한 감정. 남성과 여성, 서로 애욕에 눈먼 설사 수컷과 암컷이라 해도 사람이란 본분을 잊지 않게 해주는.


호감이 옅어지고 서로 다른 점이 보이고 자잘한 단점으로 차츰 실망과 함께 상대 역시 평범한 누구의 하나로 여겨지기 시작할 때. 좋아하는 게 같았다는 사실이 별로 중요해지지 않을 때. 연애는 그렇게 차츰 이별로 향해간다.


성숙한 이들의 연애는 역설적으로 이 때 마지막 빛을 발한다. 함께 싫어하는 것을 확인하며 쌓았던 신뢰가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는 어둡고 외로운 길을 밝히며 우리의 뒷모습을 사람의 그림자로 남기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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