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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독신 공감

꿈에 들어와

by 월영

꿈에 그 사람이 나왔다. 좀처럼 꿈에 잘 나타나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어제는 꽤 생생했다. 마치 실제로 만난 것처럼 안부를 물었고 말을 더듬거렸고 어느 순간 이게 분명 꿈이란 걸 자각하면서 깨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꽤나 간절했다. 그동안 잘 살고 있었냐고. 물었고 대화가 오갔는데 그 대화는 그새 휘발되었고 꿈속 장면들도 한나절 지나자 희미해졌지만 그 사람과 비록 꿈에서나마 동 시간의 같은 공간에서 있었다는 그 느낌의 여운이 길었다.


갑자기 그 사람이 왜 꿈에 나왔을까? 심리적 연유를 추적해 가면 아마 엊그제 생일과 그전 날 대학로에서 정말 그 사람과 닮아 자칫 따라가 확인해 볼 생각이 들었던 젊은 처자를 스치듯 만났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여러 자극들이 내 추억들을 더듬어 냈을 테고 내 신경망 어딘가에 있던 그 사람에 대한 기억 감각, 그리고 욕망 혹은 안부를 묻고 싶은 온갖 감정들의 총체들이 내 꿈을 재생하는 어떤 부분들을 자극했겠지. 거기에는 아마도 마음이라 불리는 미지의 무엇이 있었을 것이다.


김훈의 표현대로 연애란 남녀가 둘이 골방에 들어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것일 게다. 여기서 골방이란 우선 물리적 공간으로서 의미가 있다. 어두운 곳, 작은 곳. 외부와 단절된 곳에서 둘이 있어도 서로 불안하거나 불편하지 않음을 체감하기엔 골방만 한 데가 없다. 그 골방에서 감각들이 더 예민하고 그 예민한 감각들이 맞닿아도 불쾌하지 않고 오히려 무언가 판단력을 상실해 단지 눈앞에 보이는 상대만 세상의 전부인양 착시하고 착각하고 그 착시와 착각을 촉각으로 상쇄하는. 그런 걸 연애라고 했을 때, 나의 경험치는 참으로 일천하지만. 그래도 그 사람 덕에 나는 사람이 성숙할 수 있는 계기 하나를 마련했었다. 그게 서른 후반 무렵이었고. 그 시절 생일에는 그 사람의 축하와 따뜻한 포옹이 있었다.


마흔 중반을 넘어 쉰 살이 더 가까워진 요즘. 한편으로 내 나이 무렵 이렇게 가족 제도의 억압이나 책임감에서 벗어나 홀홀 살고 있는 것이 복이기도 하거니와 현대사회 진보의 덕이란 생각도 든다. 인간 삶의 나아짐이란 게 결국 삶의 어떤 책임감. 혹은 무게감을 생애 전반에 걸쳐 천천히 상쇄해 그저 인간 자체로 자유를 만끽해 보는 것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기에 그렇다. 즉 나는 그 어떤 세기의 사십 대 중반 혹은 후반 남성들 여성들보다 이른바 어른의 삶을 유예하며 철없이 살아도 되는 시대를 향유하며 사는 것이지. 거기에 연애라는 게 더 부가되면 인생은 어떨까? 궁금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건 아닐까? 그 사람과 비교하지 않을 수 있는 누군가를 만날 수 있을까? 속으로 지리멸멸 고민하다가 몇 해가 훌쩍 지났다.


그래서 결론 없는 이 글의 마무리는 이러하다. 겉보기에는 무탈한 인생일지라도 내면에서는 또 개개인마다 이런저런 사연들이 있고 무의식적 억압이 있다. 그 무의식적 억압에 따른 스트레스는 물론 생계에 대한 고민보다 후순위들이다. 해서 생계에 대한 고민으로 삶의 최전선에서 고군분투하는 분들 앞에서 내 고민이나 스트레스를 과하게 포장할 수 없다. 때문에 이렇게 내 사적인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곳에서나 조심스럽게 내 내면의 풍경이나 일상들을 적고 소심하게 제한된 지인들에게 공개한다.


결국에 마음을 다루기 위해서다.


마음속에 무엇이 있는지 평생 나는 확실하게 알 수 없을 것이고 마음의 가변성 탓에 조울의 파도를 넘나들 터. 그 마음을 알기 위해서는 우린 타인의 마음을 감지할 수 있어야 하고. 그 감지는 개개인이 신호를 보내야만 파악할 수 있다.


무엇보다 나 역시 타인이 글로 남긴 숱한 신호를 덕에 아직까지 크게 길을 잃지 않고 여기까지 온 듯싶다. 생일 즈음 전후로 이렇게 상념이 많아지는 게 내 마음의 모습들이다. 이런 나를 그 사람은 가끔 기억하거나 떠올릴지 무척 궁금하기는 하지만.


-글 제목은 서울전자음악단의 동명 곡에서 따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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