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에서 날아온 익명의 연애편지에 대한 답신
갑자기 영어로 무슨 메일이 왔다. 내용은 대충 ‘네 비밀번호는 (XXX)이다. 난 이걸 알고 있다. 나는 너의 컴퓨터를 아주 오래 전부터 해킹했으며, 네 모든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다. 나는 너의 은밀한 사생활을 모두 지켜보고 있다. 이 주소로 비트코인을 보내지 않으면 네 은밀한 사생활을 네 애인을 비롯한 SNS 친구들에게 보낼 것이다.’ 라는 식이었다. 나는 이 메일을 읽으며 몇 가지 생각을 했다.
확실히 나에 대해서 나보다 잘 아는 사람이 틀림없다고 우선 생각했다. 나도 모르는 내 애인을 안다는 것은 정말 무서운 일이다. 내가 지난 24년간 몰랐던 사실이 익명의 영어 사용자에 의해 드러나고 만 것이다. 내 애인은 누구일까? 혹시 결혼정보 사이트에서 온 것이 아닐까? 하지만 나는 24세에 바로 결혼으로 골인하고 싶지는 않다.
또, 약간의 호감을 느꼈다. 나는 내 주변에서 가장 무미건조하고 무해하게 사는 사람이라고 자신할 수 있는데, 이는 근자감이 아니라 주변의 몇몇 지인에게서도 확인받은 바이다. 그렇다면 내 사생활이 무슨 문란한 어쩌고일 리는 없고, 정말 말 그대로 사생활에 대한 것인데, 나는 자의식 과잉의 SNS 중독자이므로 모든 사생활 및 특이사항을 지금처럼 인스타그램에 저녁점호 하듯 보고한다. 고로 나를 24시간 정말로 지켜보는 쓸데없는 일을 하지 않는 이상은 나의 사생활을 아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인스타그램이다.
덧붙여 나는 주로 데스크탑을 사용하므로 해커가 웹캠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수업 듣기 싫어하는 학부생의 2345교시 못생긴 얼굴 뿐이다. 그렇다는 것은, 인스타그램만이 유일한 소통 방법이기에 이 익명의 영어 사용자는 내 인스타그램을 탐독했다는 의미이며, 이는 저 익명의 영어 사용자가 나를 알기 위해서 한국어 독해를 공부했다는 것을 뜻한다. 이정도면 국제 로맨스라고 보아도 손색이 없다. 약간의 호감을 느끼긴 했으나 우리는 아직 서로 성격을 모르기 때문에 기왕이면 내 이상형에 부합하는 외모였으면 한다.
아, 이제야 아귀가 들어맞는다. 애인과 SNS 친구들에게 내 사생활을 보내겠다는 것은 본인이 나의 애인 겸SNS 친구가 되어 내 인스타그램에 럽스타그램으로서 올라오고 싶다는 이야기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것은 유추하게 하지 말고 직접 말해 주었으면 한다. 옛날 일본도 아니고 좋아한다는 말을 하지 못해 달이 예쁘다고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약간의 희망을 가졌다. 그는 아주 오래 전부터 내 컴퓨터를 해킹해왔다고 했는데, 설마 아주 오래 전이 1개월 정도를 뜻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에 설레는 이유는, 한 달 전쯤 7년 쓴 컴퓨터를 교체하면서 포맷을 잘못해 내 하드가 다 날아갔기 때문이다. 해킹은 보통 해킹 프로그램을 설치해 이루어지는 것으로 안다. 네트워크에 의한 것으로 보기에는 집이 최근에 기존 집과 약 200km가량 거리를 넘나드는 이사를 벌였으므로 아귀가 맞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이는 이 해커는 하드가 날아간 뒤에도 유지되는 해킹 프로그램을 사용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잘 하면 내 기존 자료들도 살려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서로 호감을 가지고 상대방 국가의 언어까지 배운 사이인 만큼 이 정도는 부탁할 수 있다고 조금 염치없지만 단언하기로 한다.
물론 우리 모두가 알듯 정말로 이럴 리는 없다. 위의 비밀번호는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에나 사용하던 비밀번호이고, 2000년대 중반 이후로는 저 단순한 일곱 자리 비밀번호를 쓰게 놔두는 홈페이지도 거의 없었다. 일곱 자리 비밀번호를 사용하도록 놔둘 만큼 보안이 허술한 어느 사이트의 자료를 대충 빼내어 거기에 적힌 메일 주소로 대충 들어맞을 법한 헛소리를 보냈겠지. 아주 으름장을 놓는 듯한 말투로. ‘애인’이란 말은 내 의역이고, 실제로 메일 작성자는 ‘someone in romance’라는 말을 썼다. 대충 이런 거다. 설마 사람새끼면 누구 하나 썸 타는 인간 하나쯤은 있겠지. 사람새끼가 뭐 허튼 짓 하난 하겠지. 대충 무섭게 글을 써서 보내자. 뭐 그런 느낌으로다가.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익명의 영어 사용자가 택한 사람은 집에서 잘 나가지도 않는 히키코모리 인터넷 중독자 였던 것이다. 허튼 짓은 무슨. 설마 이 좋은 세상에 현대인의 사회생활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거라는 생각은 못 했겠지. 나도 이게 좀 그런 것 같긴 해서, 사회성을 기르고자 사회학과에 이중전공을 하러 갔지만 돌아오는 것은 영어 논문과 팀플들 뿐이었다.
대충 비웃음으로 넘길 수 있는 해프닝이었지만 웃어 넘겨서는 안 될 한 가지 역겨운 점이 있다. 앞에 언급하지 않았으나, 이 메일은 ‘네 개인적인 사생활들은 7개 정도의 포르노 사이트에 생중계되고 있다’는 식의 협박 멘트를 담고 있었는데, 이건 굉장히 인간 밑바닥 수준에 있는 협박이라고 생각한다. 애초에 중국에서 개당 십 원에 팔리는 개인정보 가져다가 랜덤 메일이나 돌리는 인간에게 뭘 바라겠냐마는, 이건 참 저열하다. 물론 나는 남성이고 상황 자체가 말도 안 되었으므로 코웃음치며 이런 우스개 글이나 쓰며 넘길 수 있었지만, 내가 남성 외의 성이었다면, 적어도 지금보단 무서웠겠지.
물론 이 뻔한 거짓말에 속지는 않았겠으나, 공언이라고 해도 이 말의 테마 자체가 불러오는 감각은 등골이 서늘할 것이다. 어쩌면 트라우마를 불러올 수도 있고, 몰래 카메라 지옥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땅에 사는 사람이라면 그 자체가 일상에 대한 불안감을 다시 상기시켰을 수도 있다. 멍청하게 이거에 속냐, 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건 어느 지점에서는 매우 불쾌한 경험이다. 아니, 모든 지점에서 불쾌해해야 하는 게 맞나.
21세기에나 가능한 낭만적 연애담은 이렇게 끝났다. 메일 작성자가 가상의 썸원 인 로맨스의 댓가로 요구한 비트코인은 약 100만원 상당이었는데, 100만원이라는 돈이 내가 카메라 바꿈질을 하며 감가상각으로 날려먹은 돈의 액수와 대충 비슷하기에 안타까운 마음을 상기시켜 그에게 비트코인은 한 푼도 보내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가 ‘이 메일을 무시했을 때 무서운 일이 벌어질 것이다’라고 으름장을 놓긴 했지만, 3170글자에 달하는 답신을 그가 매일매일 지켜보고 있는 웹페이지에 공개적으로 게시했으므로 무시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본다. 안녕, 당신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이걸 다 읽고 나면 당신의 한국어 독해 능력은 한 층 더 향상되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코리아대학교 코리안 랭귀지 학과의, 당신만을 위한 개인교습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