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문학자가 되겠다는 어린 시절의 다짐과 이를 배반한 이야기의 이야기
단순한 다름은 자주 천재성으로 오인된다. 엄마는 내가 과학 천재인 줄 알았다. 영유아기 발달과정에서 치아의 성장이나 머리 크기의 비율만큼 중요한 척도는 아이가 공룡을 얼마나 좋아하는지에 대한 정도이다. 스자 돌림 친구들에게 나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대신 별자리에 매료되어 있었다. 어떤 별자리에 있는 어떤 별은 어떤 이름을 가지고 있고, 하늘 어디를 봐야 그 별자리를 볼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떤 별자리에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는지 같은 것들을 줄줄 외웠다. 로봇을 내팽개치고 인형을 끌어안던, 요술공주 누구누구를 좋아하던 아들에게 불안감을 가지던 부모님은 마침내 과학에 대한 탐구심을 발견했다. 그 세대의 분들에게 과학은 주로 남성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으므로 이는 그들에게 안도할 만한 일이었다.
지금 그 오래된 안도와는 연속성이 없다. 이십 년 전의 엄마는 국문학을 전공하는 아들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엄마는 늘 내가 카이스트에 갈 거라 말했다. 대전 토박이가 꿈꿀 수 있는 가장 높은 이상이었을 것이다. 나는 잘 모르는 채로 복창했다. 나는 천문학자가 될 거야. 그로부터 오 년쯤 지나 소설가가 되고 싶다고 말한 아들을 엄마가 어떻게 생각했을지는 모르겠다. 이미 나는 학교에서 모아 놓은 과학 관련 대회에 전부 이름을 올리고 있었고, 프로젝트는 성공적이었으므로. 과학 대회 준비를 도와주던 선생님은 내가 과학고에 가도 소설가는 될 수 있을 거라 설득했다. 엄마도 그에 거들어 과학을 배워 과학 소설을 쓰면 되지 않느냐고 말했다. 글쓰기를 가르쳐 주시던 선생님께서는 그냥 글을 계속 가르쳐 주셨다. 결과는 전공 과목에서 드러나듯 배반의 역사로 남았다.
엄마는 여전히 하늘의 별을 가리키며 저 별의 이름이 뭐냐 묻곤 한다. 나는 무심하게 나에게 묻지 말고 어플을 깔아서 직접 보라고 대답한다. 어디에 있는 누구 이름이 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기에 별다른 방도가 없다. 지금은 하늘에서 오리온 자리의 허리띠 별 세 개나 찾으면 다행이다. 너 예전에는 별자리 다 외우고 그랬잖아, 하며 엄마는 늘 아쉬움을 표한다. 배신자의 최후다.
하지만 정말로 배반이었나. 오이디푸스나 페르세우스를 (쓰고 보니 공룡들과 같은 돌림자를 쓰는 항렬이다)기억하고 있다면 이를 배반이라 부를 수 있을까. 별자리들은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나는 처녀자리의 모양을 보고 페르세포네의 이야기를 상상할 수 있었다. 별의 이름을 외우는 건 이야기를 찾아 떠나는 과정이었다. 그 과정 속에서 우연히, 기대와는 어긋난 길을 떠나오게 되었지만 적어도 나는 별을 배반하지는 않았다. 내가 별과 처음 나누었던 일방적 약속은 그것이 담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겠다는 것이었으므로.
별자리를 외우지 못함과는 별개로 여전히 별을 좋아한다. 우주에서 무슨 일들이 생겼다는 말은 언제나 설렌다. 어떤 원리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함에도 나와 아득하게 먼 어딘가에서 어떤 일이 발생했다는 사실에 가슴이 뛴다. 별에 대해서 말하는 숫자들은 거대하다. 천문학자들이 이 숫자들에 압도되어 삶의 의지를 잃기도 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거대한 존재 앞에서 무력하게 무너지는 인간의 모습을 그리는 장르가 코즈믹 호러라는 이름을 가진 것이 우연은 아닐 것이다. 사람은 보잘것없이 작고 별은 한없이 크다. 큰 것들에는 두려움이 따른다. 대양, 심해, 광장, 고소. 다만 그럼에도 우리는 그 두려운 것들 안에서 얼마나 많은 꿈을 꾸었는가도 생각한다. 옛 그리스 사람들이 거대한 올림포스 산을 보고 신들의 거처를 떠올렸듯이. 산 꼭대기를 바라보던 이들이 그 위의 하늘을 바라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바다는 사진을 찍기 좋은 곳이다. 바다에서 찍을 수 있는 많은 종류의 사진들 중에서도 사람을 그 앞에 세워두고 찍는 것이 특히 즐겁다. 바다는 한없이 크고 단순하고 또 복잡하고 오밀조밀하다. 그 위에 서는 것만으로 우리는 수많은 내러티브를 담을 수 있다. 말을 꺼내보기 더없이 좋은 배경이다. 저 캔버스 위에다가는 내가 어떤 이야기를 그려 보아도 이해받을 수 있을 것만 같다. 바다 앞에 사람이 서면 그 순간 많은 이야기들이 생겨난다. 별은 바다를 닮았다. 누군가는 검은 하늘을 보고 괴물과 싸우는 영웅을 그렸다. 누구는 위대한 귀향의 여정을 그렸다. 누구는 비련의 이별을 떠올렸다. 그 아래 사람이 서 있었다.
영광 법성포에서 한 달 정도를 지낸 적이 있다. 밤에 완벽한 어둠이 내리는 곳은 아니었지만 별을 보기에는 충분할 만큼 어두웠다. 그만큼 많은 별은 너무 오랜만이어서 매일 밤의 주요 일과는 넋을 놓고 별을 바라보는 일이었다. 워낙 사회성이 없어 여럿이 섞이는 데에 어려움을 겪었던 나에게 고마운 일거리였다. 그만큼의 별이 있으니 사진을 찍지 않고는 못 배겨서 삼각대를 구해 밤하늘을 담았다.
거기서 만난 친구 하나(내가 되지 못했던 과학의 천재에 아마 훨씬 더 가까울 사람이라는 점이 또 절묘했다)는 별을 찍는 법을 배우고 싶다며 밤에 산길을 같이 나섰다. 한옥 지붕 아래에서 별을 보며 많은 이야기를 했다. 많은 부분은 별에 대한 이야기였다. 별자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숫기가 없는 편이지만 별을 보면서는 무슨 말이든 할 수 있었다. 몇 시간이고 주절거리며 이야기를 했다. 그 아래에서는 그래도 될 것 같았다. 숙소에 들어가서는 별 아래에서 떠올린 것들을 되짚으며 글을 썼다. 옛 사람들도 그렇게 밤을 지새우며 더블유 모양 의자 위에 카시오페이아를 앉혔을 것이다.
별에서 이야기를 배웠다. 천문학적인 숫자들은 내가 그 앞에 대고 어떤 이야기를 지어내 떠들어도 이해해줄 것만 같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 유명한 시 구절처럼 모든 죽어가는 것들에는 이야기가 있다. 죽지 않을 것만 같은 거대한 숫자는 가능성들을 품고 천문학적인 시간을 살아간다. 그 품 안에는 과학 천재가 되지 못한 나도 있다. 그렇게 죽어가도 괜찮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