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올레길 걷고 그리다 #1
아마도 살아가는 동안, 매년 봄마다 올레 앓이를 할 것 같다.
올레길 425킬로.
나와 내 인생은 올레길을 걷기 전과 걸은 후로 나뉜다.
올레길이 무엇이 길래,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답하겠다.
내가 꿈꾸는, 내가 원하는, 여행의 모든 것
길을 걷는 것, 그것도 아주 긴 길을 홀로 걷는다는 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체력적 한계에 부딪쳐 길에서 주저앉는 정도는 차라리 괜찮다.
올레길을 혼자 걸으며 가장 어려웠던 건 두려움이었다. 길을 걷겠다고 이른 아침 눈을 뜨고도 그 두려움 때문에 얼마나 많이 망설였는지.
올레길을 완주한 후에도 나는 끝내 두려움을 이기지 못했다.
아니 애초에 그것과 싸울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것은 싸울 대상이 아니다.
올레길 대장정의 마지막 걸음을 길 위에 찍었던 그 순간 나의 가장 큰 기쁨은, 더 이상 걸을 길이 남아 있지 않아 다행이라는 것.
이젠 이 길을 다시 걷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정말 지쳐있었다.
그 후 얼마 동안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집안에 파묻혀 며칠을 지내며 집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무 이유 없이 툭,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어라? 왜...
나는 그 눈물이 어이없어 자리에 주저앉아 펑펑 울었다.
그리고 내 눈 앞에 펼쳐진 길,
425킬로의 그 길
흙길, 돌길, 진창길, 때론 아스팔트. 평탄하고 구불구불했던 그 길들. 좁은 골목과 돌담, 들판과 오름, 바닷길. 그 길에서 수없이 만났던 바람과 낯선 모습들.
그리고 길 끝에서 만나는 저녁의 일몰, 아름답지만 쓸쓸하고 황홀하지만 외로웠던 그 하늘이 하나하나 떠올랐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컴퓨터 앞에 앉았다. 몇 날 며칠 그 길에 대한 길고 긴 이야기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면 더 이상의 아쉬움도 미련도 없어 덜 그립고 덜 떠오를 줄 알았다.
아니었다. 그건 아니었다. 그것만으론 다 채울 수가 없다.
나는 도저히 올레길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빈곤한 나의 언어론 미처 담아내지 못하고 당해낼 수 없는 올레길을 그리고 싶었다.
그림을 그릴 수 있다면 내가 그림을 그릴 수 있다면, 이 시간을 이 공간을, 이 기억을 좀 더 붙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혼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을 배운 적이 없고 어릴 때부터 그림엔 젬병이라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바람만 있을 뿐이지 어떻게 그려야 하는지에 대해선 아무것도 몰랐다.
석 달을 골방에서 고군분투하며 끈질기게 그림을 그리다 밖으로 나갔다.
눈앞에 길이 있다. 골목과 마을, 오름과 바다가 펼쳐져 있다.
그걸 붙잡아 그림을 그릴 때의 설렘과 감동은 길을 걷는 여행자에게 주어지는 또 다른 선물이었다.
나의 스케치북에 고스란히 남은 시간과 공간, 기억을 거듭 들여다보는 것은 여행이 남긴 값진 기념품이었다.
나는 그림쟁이가 아니고 그림쟁이가 될 수 없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자연을 사랑하고 여행을 좋아하는 평범한 글쟁이로서 날마다 제주 구석구석을 걷고 보고 느끼며 현장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 그러니까 그림 이전에 여행이 있고 여행엔 언제나 이야기가 있으며 그림은 그 이야기를 담는 또 하나의 기록이고 흔적이다.
한여름엔 땡볕 아래서, 바람 부는 날엔 종이를 꼭 붙들고, 겨울엔 시린 발을 동동 구르며 그림을 그렸다.
하지만 땡볕보다 바람보다 추위보다 나를 이기는 건 제주의 바다와 오름, 나무와 숲, 작은 마을과 돌담, 그리고
그것들을 그리는 나였다
내가 여행하면서 그 자리에서 그림을 그리는 이유다
그러니까 내 그림은 그림이 아니다. 어떤 사람, 그 사람, 자연과 여행, 인생을 너무도 사랑해 매 순간 감사한 어떤 사람의 표현할 길 없는 언어의 또 다른 몸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