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올레길 걷고 그리다 #3
제주 올레길 스물여섯 개의 코스 중에는 하루 종일 길을 걷는 동안 단 한 사람도 만나지 못하는 코스도 있다. 한 코스 당 평균 15킬로 거리에 사람이 없다는 건 도무지 믿지 못할 얘기인데 사실이 그렇다.
제주올레에서 내놓은 올레 가이드북이나 올레길에 관한 여러 책자에도 이런 얘긴 자세히 나와 있지 않으니 나 같은 걷기 여행 초짜가 처음 필드에 나가보고 얼마나 당황했겠는가.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어찌 보면 휑하기까지 한 그 넓은 곳에 사람커녕 이따금씩 생각났다는 듯 드문드문 작은 마을이 나타날 뿐이다. 혼자 여행에 무척이나 조심스러운데 지나는 사람까지 없는 그런 곳을 하루 종일 걷다 보면 세상 끝에라도 와 있는 듯하다.
올레길의 유명세가 허위가 아닐까 의심했었다. 한편으론 제주에 이렇게 텅텅 빈 땅이 많은데 집값, 땅값이 왜 이렇게 높은 지 의아했다.
잘 부쳐놓은 계란 프라이 모양의 제주는 서울 면적의 세 배나 되는데 인구는 오십만-최는 몇 년간 이주민이 급속하게 늘었다-이 채 안 되는 화산섬이다. 해발고도 1950미터의 한라산이 섬 중앙 노른자 위치에 있고 사람은 산 아랫자락에서 살고 있다. 중산간도 여름에는 서늘할 정도니 비교적 따뜻하고 평평한 해안가에 사람이 모여사는 건 당연하다.
올레길은 사람이 모인 곳을 의도적(?)으로 피해 길을 냈으니 그 길에서 사람을 볼 수 없는 것은 이해하지만 처음부터 그런 걸 알 리가. 그 길을 다 걷고 나서야 올레길에 사람이 없다는 걸 눈치챘으니 나의 무지와 무모함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미용실에 갔다. 평생 긴 헤어스타일이던 머리를 반 토막 냈다. 그리곤 제주올레 사무국으로부터 안전지킴이 단말기를 대여했다. 목에 걸고 다니는 펜던트 같은 이 작은 기계는 위급상황에 가운데 버튼을 누르면 카메라가 찍히는 동시에 득달같이 경찰이 전화를 걸어주는 시스템이다. 무척이나 예민해서 가방에 눌려지거나 떨어뜨리는 실수로 두 번이나 경찰의 전화를 받았다. 나는 얼굴이 달아오를 만큼 당황했는데 전화를 걸어준 경찰 아저씨는 아무 일 없으니 되었다며 무슨 일 있으면 언제라도 누르라고 자상하게 말해주었다.
머리를 자르고 단말기를 목에 걸고도 하나 더 챙긴 건 가스총이다. 가스총은 꽤나 무게가 나가서 걷기 여행에 귀찮은 물건이지만 나는 올레길을 걸을 때 물병은 빠뜨려도 가스총은 잊지 않고 가지고 다녔다. 1초 안에 신속 정확히 가스총을 꺼낼 수 있도록 연습도 단단히 해두었다.
머리를 자르고 최첨단 호신 기계에 가스총까지 무장하고 여행을 떠나는 나는 마치 여전사라도 된 듯한 기분으로 1코스의 끝이자 2코스의 시작 지점인 광치기 해변으로 갔다. 시작이 끝이고 끝이 시작인 순환구조는 올레길의 의의이자 매력이다. 해질 무렵 도착한 그곳에서 다음번엔 아침에 여행이 시작하는 묘한 기분이다.
끝의 안도와 만족이 시작의 기대와 설렘과 만나고, 끝의 허무와 아쉬움이 시작의 걱정과 불안과 마주한다.
또한 끝의 피로와 시작의 의기충천이 겹치는 장소이기도 하다. 그래서 올레길을 걸으면 하나의 자세를 얻는다. 좋은 건 좋은 게 아니고 나쁜 건 나쁜 게 아니라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다 받아들이는 삶의 자세, 나에게는 참 부족했던 것.
나는 광치기 해변의 간세 머리를 쓰다듬으며 '오늘도 부탁해'라고 말을 건넨 후 길을 걷기 시작했다. 저 앞에선 벌써 올레 리본이 온몸을 흔들며 이리로 오라 한다. 제주의 파란 하늘과 감귤의 주홍빛을 따와 만든 리본은 올레길의 귀여운 애교꾼이자 든든한 안내자다. 나뭇가지에 묶인 올레 리본이 봄바람에 살랑살랑 흩날리는 건 언제 봐도 기분 좋다. 여러 올레 표시 중에 리본이 제일 반가운 건 그래서인가 보다. 다른 표시들은 붙박이처럼 멈춰있는데 리본만은 감정을 가진 그 무엇처럼 쉴 새 없이 움직인다. 지금처럼 살살 손을 흔들거나 어깨춤을 슬쩍 출 때도 있지만 때론 정신없이 재촉하거나 묵묵부답일 때도 있다. 어떤 리본은 해맑은 아이처럼 보이지만 어떤 건 색이 바래고 잘려 나간 것도 있다. 그런 오래된 리본은 금방이라도 바람에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아 불안하다. 리본이 없으면 길 찾기가 매우 난감하다. 특히 나무가 빽빽이 우거진 숲에서는 단 한 개의 리본도 중요하다.
광치기 해변에서 시작한 올레 2코스는 아스팔트 도로와 읍내 마을을 걷게 하는 좀 지루한 길로 이어지더니 홍마트가 있는 중간 지점을 벗어나서부터는 올레길 특유의 텅텅 빈 길로 접어든다. 쌀쌀한 꽃샘바람이 부는 사람 하나 볼 수 없는 길고 긴 길을 걷는데 대여섯 개의 감귤을 넣은 비닐봉지들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다. 파는 사람은 없고 "무인 판매, 천 원"이라고 쓰인 종이 한 장 달랑 있을 뿐이다. 무인 판매, 무인 카페, 무인 휴게소... 나는 올레길을 걸으면서 이런 '무인'의 유일무이한 유인으로 혼자 귤을 까먹고 혼자 커피를 마시고 편지도 쓰고 소소한 기념품도 사곤 했다.
올레길 모든 코스에는 오름이 한 두 개씩 꼭 있다. 2코스는 바다에서 시작해 오름을 두 개 오르고 다시 바다에서 여정이 끝나는데 이번에는 구제역으로 식산봉이 폐쇄되어 대수산봉에만 올랐다.
올레길에서 만나는 오름은 기쁨인 동시에 복병이다. 평지 15킬로만 걸어도 벅찬데 오르락내리락해야 하는 오름은 체력적 고비이기도 하다. 하지만 정상에서 맞는 바람은 탄산수처럼 상쾌하다. 시야가 확 트이면서 펼쳐지는 풍경과 마주하면 오르느라 힘들었던 기억은 단박에 날아가버리고 기쁨이 밀려온다.
나무가 없는 민둥산 오름은 사방팔방이 트여 있어 시야가 확보되지만 숲으로 이루어진 오름은 또 하나의 고비가 아닐 수 없다. 대낮에도 어두컴컴한 아무도 없는 숲 속을 혼자 지나는 건 남성이라도 무섭지 않을까. 1코스 때 올랐던 알오름은 민둥산이어서 별 걱정 없이 쉽게 올랐지만 2코스의 대수산봉을 오를 때는 잔뜩 졸아서 빨리 지나고 싶다는 마음만 급급해 그곳에 뭐가 있었는지에 대한 기억이 없다. 정상에서 본 성산과 우도만은 뚜렷이 남아 있다. 대수산봉에서는 성산과 우도가 유난히 가까워 보인다. 각이 팍팍 선 성산과 기다란 능선으로 이루어진 우도는 과묵하고 힘센 남자와 참하고 부드럽지만 결코 만만찮은 여자처럼 보인다.
오름을 내려와 인적 없는 조용한 농로를 걷는데 어디선가 갑자기 후다닥 소리가 나서 깜짝 놀랐다. 저 앞에 노루 한 마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잠시 나를 바라보다 숲 쪽으로 도망 가느라 허둥댄다. 얼마나 사람이 다지 않는 길이면 노루가 다 출몰할까. 제주에서 만 2년을 살고 있는 지금이야 노루를 만나도 '아, 노루구나'하고 말지만 당시에는 그야말로 까무러칠 만큼 놀랐다.
그런데 나를 좀 바라보다 도망간 건 뭘까. 실제론 몇 초가 되지 않을 짧은 시간이었겠지만 분명히 그 노루는 나를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왜 그랬을까. 노루가 사람을 알아보는 걸까. 노루는 날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노루 생각을 하며 걷는데 이번엔 말들이 떼로 나타났다. 말 역시 지금이야 풀어놓은 동네 개만큼 친숙하지만 그때는 길에서 만나는 말들이 야생마처럼 보였다. 콧바람을 힝힝 불고 갈기를 휘날리며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툭툭 불거져 나온 근육질의 다리로 걷어찰 것만 같았다. 하지만 말들은 나 같은 얼치기 여행자 따위 보이지도 않는지 눈길 한 번 안 주고 오직 풀 뜯어먹는 일에만 전념하고 있다. 그런데도 나는 뛰다시피 하며 말들에게서 도망쳤다.
그렇게 온종일 노루와 말 외에 사람을 못 만나다 반듯한 전각과 잘 가꿔진 정원이 있는 혼인지에 들어섰을 때는 야생에서 문명의 세계로 진입하는 것만 같다. 혼인지는 유명 관광지가 아니라서 한가롭긴 마찬가지지만 말끔한 옷차림과 산책하듯 느긋하게 걷는 몇 명의 문명인이 반가워 인사라도 하고 싶었다. 산도 아니고 올레길도 아닌 전각에서 만난 사람에게 인사를 하는 건 생뚱맞은 일이 아닐 수 없어서 입을 꾹 다물고 천천히 혼인지를 돌아보았다.
혼인지는 제주 시조 신화와 관련 있는 곳이다. 기념물 17호로 지정되어 있는 혼인지는 말끔하게 정비된 산책길에 작은 연못이 있고 푸른 나무들과 수국이 있는 정원에 몇 채의 아담한 전각이 어우러진 고즈넉한 곳이다. 고풍스러운 분위기에 젖어 천천히 걷다 보면 멀리서 가야금 뜯는 소리라도 들릴 것만 같다.
햇살은 반짝이며 나무들과 길 위에 화관을 드리우고 밝고 화사한 기운이 혼인지 전체를 감싸 안는다. 그대로 마냥 따사로운 햇빛을 쬐고 하염없이 앉아 있고 싶다.
2코스는 세 그루의 폭낭(팽나무)과 한적한 포구가 있는 온평 마을에서 끝이 난다. 온평 마을 '온평'이 한자로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나에게 온평 마을은 '온화하고 평화로운 마을'로 남아 있다. 그런 마을이라서 아름다운 신화가 탄생한 거라고, 유난히 반짝이며 화사한 기운으로 감싸인 혼인지가 온평 마을에 있다는 건 그래서라고, 충분히 납득했다.
옛날 옛적 저 먼 벽랑국의 세 공주가 나무궤짝을 타고 바다를 건너 온평 마을로 떠밀려 왔다. 탐라의 시조 고 씨, 양 씨, 부 씨는 공주들을 맞이하여 온평 마을 혼인지에서 각각 짝을 이루어 혼인을 한다. 혼인지에는 겉에서 보면 들어갈 수나 있을까 싶은 작은 굴이 있는데 안에는 세 개의 공간으로 나뉘었다. 세 쌍의 부부는 굴에서 첫날밤을 보낸 후 북쪽으로 건너가 탐라를 다스리는 시조가 되었다. 살면서 고 씨, 양 씨는 만나봤지만 부 씨는 제주에서 처음 들었는데 심지어 제주에는 부 씨가 많다니 신화의 현실성을 절감할 수밖에 없다.
2코스 종점에는 정자가 있는데 마침 일인용 소파 의자가 하나 있었다. 검은색 레자 가죽 소파는 낮 동안 햇빛을 받아 따끈따끈했다. 낡았지만 제법 푹신하고 따뜻한 의자에 앉아 있으니 피로가 풀리는 듯 해 이대로 좀 더 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해가 지려면 시간도 좀 더 남았다.
다음 코스를 조금 더 걸어볼까. 그러면 길도 더 빨 끝날 거다. 그런데 왜 길을 빨리 끝내야 하지?
오늘은 오늘의 길만 걷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