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올레길 걷고 그리다 #8
올레길 전체 코스 중에서 가장 인기 있는 7코스는 J와 함께 걷고 싶었다.
"걷기는 10킬로까지가 딱 좋아. 자연? 아무리 좋아도 너무 자주 보면 눈에 안 들어온다고."
말도 안 돼. 그렇다면 그 수많은 올레꾼들은 다 뭔데. 올레길이 유명해져서 전국에 트래킹 코스들이 많아진 건 다 뭐고. 지리산 둘레길, 부산 갈맷길, 청산도 슬로길, 금오도 비렁길 말이야. 그 길들에 초석을 마련한 건 올레길이라고. 누구나 자연을 좋아하지 않고 누구나 여행을 하고 싶은 건 아니라고? 믿을 수 없어.
제주에 내려오기 전 육지에 살았을 때 나는 평일과 토요일 오후 1시까지 꼬박 일을 했었다. 빌딩에 갇혀 창으로 밖을 내다보면 거리를 걷는 모든 사람들이 자유로워 보였다. 모두 어디로 가는 걸까. 은행이나 장 보러 가거나 그저 볼 일이 있어 왔다 갔다 할지도 모르는데도 평일 오후에 길을 걷는 사람들이 나는 부러웠다. 그러니 지금 이렇게 걸을 수 있는 체력과 시간이 주어져 나는 그저 감사하다. 혼자 다니는 건 여전히 무섭지만. 걷기를 싫어하는 J니 할 수 없지. 뭐, 혼자 가도 좋다.
올레 7코스는 바다를 보며 길이 시작한다. 열대 식물과 야자수로 잘 가꾼 산책로를 따라 걸으면 새연교와 새섬이 보이고 곧이어 외돌개를 만난다. 제주에는 기기묘묘한 기암괴석이 많은데 나는 그중에 외돌개를 최고로 친다. 외돌개는 거인처럼 보이는 아주 커다란 돌이다. 섬세하게 조각한 예술작품 같기도 하다. 외돌개 꼭대기에는 잘 다듬은 머리카락처럼 나무가 자란다. 머리 아래로 툭 튀어나온 이마와 눈, 코, 입이 있고 굵은 몸통은 당당하고 호기롭다. 등은 용비늘 모양으로 정교하게 깎은 옷을 걸친 듯하다.
바다에 홀로 외롭게 있어 외돌개라는 이름이 붙었는데 무려 150만 년 전에 화산이 폭발하면서 바다에서 솟구쳐 형성되었다. 150만 년이라는 시간은 가늠하기 어렵다. 내 눈에 보이는 외돌개는 얼마 전에 솟아난 바다 거인이다. 그 옛날 사람들도 외돌개가 사람처럼 보였는지 외돌개에는 고려 말 최영 장군의 전설이 담겨 있다. 묵호 세력을 토벌하기 위해 최영 장군은 외돌개에 옷을 걸치고 불을 비춰 맞은편 범섬에 숨어 있던 적들을 놀라게 했다. 거대한 장군의 모습을 보고 놀란 적들은 바닷속에 뛰어들어 죽거나 투항했다고 한다. 과연 바다를 향해 입을 쩍 벌리고 있는 외돌개를 밤에 보면 포효하는 장군의 목소리가 들릴 것도 같다. 우리 조상들은 특별한 돌에는 영험한 기운이 서려 있다 믿는데 그런 걸 믿지 않아도 외돌개를 보면 확실히 어떤 기가 느껴진다. 가까이에서 쓰다듬어 보고 싶지만 벼랑을 타고 내려갈 수도 없고 내려간다 해도 바다가 가로막으니 그저 눈으로 보는 수밖에.
외돌개를 지나면 유채꽃이 활짝 핀 바닷길로 유명한 돔베낭길이다. 바다를 보며 걷는 꽃길이다. 소문대로 7코스는 시작부터 황홀해서 걷는 것이 아니라 둥둥 떠다니는 것 같다.
키 큰 야자수 한 그루가 시원스레 보이는 서귀포 여고를 지나 대륜동 해안 길로 들어서니 빨강, 초록 우체통이 예쁜 이색적인 바닷가 우체국이 나온다. 이곳의 우체통에 편지를 넣으면 일 년 후에 배달된다. 유채꽃이 한가득 피어 있는 바다 너머 범섬이 보이는 자리에서 도시락을 먹고 정자에서 쉬는데 바람이 솔솔 불어온다. 바다 물결은 잔잔하다. 아닌 게 아니라 편지 쓰고 싶은 분위기다.
누구에게 편지를 쓸까. 나에겐 엄청난 프로젝트인 올레길 걷기, 여기 7코스까지 잘 걸어왔다고 자랑하고 앞으로 걸어야 할 길을 응원해 줄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고 싶은데 한참을 떠올려도 적당한 사람이 떠오르지 않는다.
J와 엄마 외에 내가 올레길을 걷고 있다는 걸 아무도 모른다. 엄마는 혼자 위험하고 힘든데 뭣 하러 다니냐고 걱정만 하고 J도 내가 올레길 걷는 걸 딱히 찬성하는 건 아니다.
그림을 그리면서 누구에게 편지를 쓸지 내내 생각했다. 여섯 개의 우체통을 그렸다. 빨간 우체통 다섯 개와 초록색 우체통 하나. 초록색 우체통은 '보내지 못한 편지'란다. 아래는 이렇게 적혀 있다.
'말하지 못해 안타까웠던 그 시절, 지금도 가슴에 무던히 새겨진 그 사람. 어쩌면 지금은 볼 수 없는 당신에게.'
여고생이었을 때만 해도 나는 날마다 편지를 썼었는데 지금은 편지를 전해 줄 사람이 없다니 내가 변한 걸까, 편지를 주고받지 않는 세상이 이상한 걸까.
나는 여기 바닷가 우체국에서 편지를 쓰고 싶다. 그 편지를 바닷가 우체국에 부치면 바다 위에 띄어졌으면 좋겠다. 병 속의 편지처럼 바다를 동동 떠다니다 누군가에게 전해지기를.
잘 지내나요? 나도 잘 있답니다. 나에게 답장을 보내주세요.
나는 답장을 받고 싶어 편지를 쓰고 싶은 걸까. 그렇다면 나에게 편지를 쓰자. 지금 그리는 이 그림을 부치면 된다. 길을 걷는 것, 길을 걷다 그린 그림은 지금 내가 가장 받고 싶은 행복한 편지다. 일 년 후에 이 그림을 받으면 어떤 마음이 들까. 일 년 전에는 그림 참 못 그렸다, 그럴까. 아니면 일 년 전 오늘을 떠올리며 추억에 젖을까. 일 년 후에 나는 무얼 하고 있을까. 그때도 길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을까. 생각하면 할수록 궁금한 게 너무 많다.
바닷가 우체국에서 그림을 그리고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여름날 한치 축제가 열리는 법환 포구를 지나니 울퉁불퉁한 돌길로 이루어진 바닷길이다. 다른 올레길에선 본 적 없는 올레꾼을 오늘은 자주 본다. 내 앞에 앞서가는 아가씨는 큼직한 카메라 가방과 긴 우산을 들고 기우뚱거리며 돌길을 걷고 있다. 카메라도 우산도 거추장스러워 보이는데 저 아가씨 나름의 걷기 여행 필수 장비겠지. 하긴 올레길 풍경이 워낙 좋으니 사진으로 남기고 싶을 테고 언제 갑자기 비가 올지 모르니 우산 겸 지팡이도 필요할 테고. 나도 다음 코스부터는 카메라를 들고 다닐까.
바닷가 우체국이 또 있다. 이번엔 길거리에 있는 진짜 그 빨간 우체통이 정자 위에 세워졌다. 7코스는 정말로 편지를 쓰고 싶은 길인가 보다.
구럼비와 해군기지 설치로 떠들썩한 강정 마을을 지나 월평 포구로 들어섰다. 작은 월평 포구는 아늑해 보인다. 달 밝은 밤에는 포구의 물결 위에 달이 비춘다는 월평 포구. 높은 곳에서 내려 보니 몇 척의 배가 그릇에 담긴 작은 미니어처처럼 보인다. 물결이 출렁일 때마다 배가 흔들린다. 포구는 새 둥지 같기도 넉넉한 누군가의 품 같기도 하다. 좁은 물길을 사이로 이쪽과 저쪽의 물이 다르다. 물빛이 다르고 물결도 다르다. 좁은 물길 목은 포구에서 바다로 바다에서 포구로 드나드는 통로다.
우체통도 길목이다. 이쪽과 저쪽을 연결해주는, 누군가에게 가는 입구. 내가 여기서 그림을 그리는 것, 나에게 보내는 내 편지는 내가 나에게 가기 위한 바람이다.
바다를 향해 나무 데크 길이 뻗어 있고 길 끝에는 커다란 너럭바위가 펼쳐져 있다. 벼랑 아래는 포구다. 포구에는 낚시꾼들이 많다. 모든 게 참 근사하다.
월평 포구를 지나 마을로 들어서 7코스 종점 송이 슈퍼에 도착했다. 작은 마을의 오래된 송이 슈퍼가 낯설지 않다. 어릴 때 외할머니 동네에 유일하게 하나 있었던 약방 겸 슈퍼와 비슷하게 생겼다.
7코스는 멋지고 근사한 대신 대중교통이 불편하다. 버스를 몇 번이나 갈아타야 하는데 자주 오지도 않는다. 1코스 때 제주에서 처음 버스를 타고 어리둥절했었던 적이 얼마 전인데 벌써 나는 제주 버스 노선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다. 버스 노선이 익숙해지는 만큼 내가 걸은 올레길도 점점 길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