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리옹Lyon] 01
분노의 5단계(부정-분노-타협-우울증-수용)와 비슷하게 나에게는 스트레스/우울의 5단계가 존재한다. 나도 모르는 사이 정형화된 단계별 행동은 무의식 중에 내가 어느 정도로 스트레스/우울이 심각한지 나에게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실제로 최근 3년 정도 이 행동들로 내 상태를 파악할 수 있었고, 스트레스/우울의 원인을 찾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1단계: 소비
2단계: 게임 스트리밍 생방송 챙겨보기
3단계: 게임하기(1단계와 2단계가 병행되는 대환장의 단계. 2단계를 보면서 콘솔, 모바일 게임을 2개 이상 돌리며 1단계를 아낌없이 한다.)
4단계: 일기 쓰기
5단계: 해소
소비-소비-소비-해소-해소라는 단순한 5단계이지만 꽤나 나에게 유용하여, 최근에는 2단계에 진입하고 바로 '아, 내가 스트레스/우울이 있구나, 하지만 아직 초기 단계로군. 원인이 뭘까?'를 알아채는 상태까지 되었다. 알아채고 나서 바로 원인을 찾아낼 수 있을 정도로 가볍다면 모든 걸 건너뛰고 5단계로, 그렇지 않으면 4단계에서 정리하여 5단계로 진입한다.
본업이 문서나 자료를 읽고 글로 써내는 일이 굉장히 많고, 출장이 많아 개인 시간이 매우 부족한 탓에 일기를 쓸 정신머리나 여유가 없다. 이 때문에 일기의 대부분은 당시의 스트레스/우울의 원인을 찾는 과정의 나의 감정들로 도배되어있다.
감정과 더불어 각종 삶의 원칙과 대처방법들도 이따금 작성되어있는데 신기하게도 일기를 쓰면서 전부 해소해버리는지, 그다음 스트레스/우울의 4단계에 진입하여 일기장을 펴면 과거와 현재가 비슷한 감정 수준이거나 거의 똑같은 상황 및 원인에 대한 분석이 쓰여 있어서 훨씬 전의 기록부터 다시 읽어본 후 헛웃음을 지으며 일기장을 덮어버리는 게 최근에 많이 있는 일이다.
개인적으로 2013년에 타자에 의해 나의 존재가 통째로 흔들려버리는 일이 있었고, 그 일이 2019년 현재까지 나의 발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고 있다. 나의 일기의 대부분은 독으로만 가득한 글과 더불어 타자가 정의하는 내가 모르는 나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루며, 2013년 이후에는 대부분 이 일 이후의 후유증 비슷하게 남은 것들로 발생하는 각종 문제들로 인한 스트레스/우울의 내용만이 가득 채워져 있다.
이 일로 상담도 받았고, 몇 가지 사실 확인 과정을 통해 이 일이 발생한 원인은 '나의 문제'가 아니라 '타자의 왜곡된 정보로 인해 나에게 발생한 문제'로 정리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일은 여전히 나에게 약점이며, 다시는 쳐다보기도 싫은 내가 가장 싫어하는 기억의 한 조각이며, 6년간 내가 아무런 성장을 하지 못했다는 처절한 증거이기도 하다. (6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여전히 그 일로 나를 힘들게 한 사람들의 이름을 듣는/보는 것조차 싫다. 가장 심할 때는 특정 차종(나를 힘들게 한 사람의 차종)이 내 앞을 지나갈 때 급격하게 심장박동수가 증가할 정도였다.)
그리고 2018년, 발목 잡던 그 일이 결국 나를 넘어트렸다.
2018년 초 나의 일기장은 다시 독과 분노로 터질 듯했고, 나의 존재와 나의 쓸모에 대한 생각을 계속하게 되었다. 비슷하면서도 서로 다른 이 일들이 결국 나를 흔들다 못해 통째로 삼켜서 없애려는 것 같았다.
2018년의 중순 '나는 내년에 없겠구나'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고, 이 생각은 너무나도 당연해서 2019년 어느 날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모든 것을 그만두려고 했고, 모든 것을 내려놓으려고 했다.
그 해 말 출근하기 싫어 늑장을 부리려고 보게 된 영상으로 독과 분노, 그리고 7개월 가까이 이어진 슬럼프가 갑자기 사라졌다. 물론 그 전 날 자기 전 영상을 만든 크리에이터 분이 떠올라서 다음날 본 것이지만, 언제나 그렇듯 이런 순간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갑자기 온다.
내가 겪고 있는 문제들을 직접적으로 해결해 줄 수 있는 내용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무작정 다 괜찮다고 위로하는 내용도 아니었고, 나와는 어떠한 연결이나 공감대가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나도 겪고 있어
단지 이 느낌만 받았을 뿐.
누군가의 조용한 공감이 그동안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을 뚫고 나올 수 있는 강한 힘을 준 새로운 경험의 순간이었다. 물론 공감과 새로운 경험이 모든 문제를 해소/해결하진 못했지만 적어도 모든 것을 내려놓으려던 결정은 잠시 멈춤 상태가 되었고, 이것은 나와 주변에 영향을 미쳤다.
그동안 위의 문제가 원인인 불안정함, 끊임없는 자기부정, 그리고 2018년의 절반 이상 슬럼프였던 나로 인해 (아마도 많이) 힘들었을 동료 선배가 지난 4년 간 격무로 고생했다며 잠시 쉬어가라며 2달간 휴가를 주었다.
사실 너무나도 현재에서 도망가고 싶었기 때문에 휴가 계획은 오래전부터 해보고 싶었던 '한 달 살기'로 바로 결정했다.
2013년, 2018년에 발생한 일은 절대 해결되지 않고, 끊임없이 나를 괴롭힐 것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럼에도 더는 일기에 같은 내용이 반복되지 않도록 발목을 잡고 있는 문제들과 함께 떠나기로 했고, 잠시 일기가 아닌 다른 형태로 기록해보기로 했다. (혹시 말도 안 되는 어느 순간에 누군가에게 나의 경험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