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를 매개로 하는 어떤 치유
내 동생에게
너는 나이를 먹는다는 감각을 알고 있니? 머리는 작아지고, 몸집은 커지는데 점점 집에 있는 시간이 줄어드는 그런 게 나이를 먹는다는 것 같아. 그리고 어느 정도 나이를 먹으면 다시 어릴 때처럼 몸집은 작아지고 점점 집에 있는 시간은 늘어나지.
너는 내 안에서 나이를 먹지 않아. 너는 내 안에서 항상 그대로야. 도대체 몇 살인지 모를 그 모습 그대로 말이야.
저번에 너에게 편지를 썼을 때 있었던 일이야. 이상하리만치 '백중사리'라는 단어를 두 번이나 썼지?
백중사리는 내가 좋아하는 말인데, 한참 잊어버리고 있다가 최근에서야 다시 기억났어. 내가 그 단어를 좋아했다는 것도, 그 단어가 있었다는 것도.
나는 정신적으로 안정이 되지 않으면 언어와 단어의 상실을 느껴. 아마 나 말고도 많은 사람들에게 먼저 찾아오는 증상이기도 할 거야.
대화하다가 적확하고, 합당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 '거시기'라고 말해버리거나, '그거 있잖아' 라고 사물대명사나 지시대명사를 일단 뱉어내버려. 일단 뭐라도 단어를 뱉어내는 게 대화의 템포를 이어가는 데 필요하고, 서로 대화에 집중하고 있었다면 '거시기'든 '머시기'든 내가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 상대방은 알아듣거든. 확실히 예전에 비해 이렇게 말하는 빈도가 점점 증가하고 있어.
나의 경우 나이 먹음과 함께 우울 빈도도 잦아졌기 때문에 단어 소실의 원인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어. 내 언어 재능을 생각하면 아마 우울 때문이지 않을까. 왜냐면 한국어-한국어 통역을 잘했던 내가 어느 날 갑자기 단어를 잃어버렸다는 것은 꽤 큰 충격이었거든. 세상에 그 많고 빛나는 단어들을 '거시기', '그거'라고 퉁쳐버리는 내가 싫어지기도 했어.
단어 소실 이후에는 자잘한 것들이 점차 기억나지 않기 시작했어. 아마도 숨 쉬는 것, 밥 먹는 것, 배설하는 것과 같이 매우 중요한 게 아니면 기억하지 않는 게 에너지가 덜 소모된다는 것을 드디어 몸이 깨달았던 것 같아. 예전에는 아무 생각 없이 출근해도 할 일을 빠짐없이 했는데, 이제는 출근 전에 오늘 해야 할 일을 곰곰이 생각해 보거나, 화이트보드에 이번 주 할 일을 주욱 나열해 놓고 마감일을 체크하고, 하루 하루해야 할 일들을 확인하곤 하거든.
에너지가 고갈되어 우울이 깊어지는 시기에는 글을 제대로 쓸 수도 없었어. 분명 나는 호응하는 말들을 썼다고 생각하는데 다시 읽어보면 비문이거나, 말도 안 되는 오타들이 말이 되는 것처럼 자리 잡고 있었거든. 에너지가 없다는 것이, 우울한 것이 그나마 나의 장점인 언어를 빼앗아 버린 기분이었어. 그런데 그 와중에 언어를 빼앗고, 나의 기억을 빼앗아 가는 우울을 겪으면서도 일에 영향을 주는 것처럼 보이기는 싫었어. '너의 우울증 때문에', '네가 우울하기 때문에'가 나의 능력을 갉아먹는 것을 견딜 수 없어서 우울함이 내 언어를 빼앗지 않은 척, 기억을 빼앗지 않은 척하느라 항상 밭은 숨을 쉴 수밖에 없었어―하지만 놀랍게도 내 주변에는 이런 말을 내게 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어. 다른 누군가가 우울증이 있다고 하면 나도 그를 향해 이런 말을 하지는 않을 거야. 그렇다면 이 생각은 어디에서 온 걸까?―.
사실 우울증도 다른 병과 같은 것이라서, 몸의 기능 저하가 오는 것이 당연해. 장염이 걸려 일을 못하는 거나 우울증이 걸려 일을 못하는거나 비슷한 일이거든. 그런데도 그냥 나 혼자 그렇게 눈치를 보며 '우울하다고 해서 일을 못 하는게 아니란 걸 보여주겠어'라고 마음먹었는데, 결국 출근을 안하고 연차를 냅다 통보하는 만행을 저질렀지.
약물치료 1개월 차, 항우울제와 항불안제를 차츰 증량하는 중에 하마글방 새 기수 모집 알림 트윗을 봤고 입금 먼저하고 신청서를 썼어.
작년 들어 계속 뒤집어지던 세상이 기어코 내 가까이 있는 세상까지 본격적으로 뒤집어 놓기 시작해서 글을 여러 차례 쓰고, 또 쓰고, 고치고, 지적받고, 다시 썼어. 항상 쓰고, 고치고, 지적받고, 다시 쓰며 글을 생산 해내야만 했지. 작가는 아니지만 내가 하는 일의 절반은 글을 쓰는 일이니까.
쓴다는 것이 점점 힘들어져서 쓰는 일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하마글방을 만나게 되었어. 이번 글방 주제는 '경계에 선 여자들'이어서 더욱 스스럼없이 신청했는지도 몰라.
아마도 국가와 국가 사이에서 발생하는 디아스포라*에 대해서 이야기하겠지만, 나는 국가와 국가가 아니라 무언가와 무언가, 예를 들면 세대와 세대 아니면 활동가와 시민 사이에서 끼어서 이도 저도 못하고 어느 쪽의 정체성도 확고히 하고 있지 못한다고 생각했거든. 내가 나랑 가장 친하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고, 항상 어딘가의 경계에서 머뭇거린다는 생각을 자주 해서 '경계에 선 여자들', 이게 너무 내 이야기 같아서 더 반가운 마음에 글방을 신청했어. 네가 그 때 내 모습을 봤다면, 그 트윗을 읽고 간만에 미소를 띤 나를 봤다면 너도 함께 미소 지었을지도 몰라.
*디아스포라Diaspora는 사전적 의미로는 '흩어진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팔레스타인을 떠나 온 세계에 흩어져 살면서 유대교의 규범과 생활 관습을 유지하는 유대인을 이르던 말(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이야. 하지만 요즘은 고국을 떠나 다른 국가에 생활/정착하는 사람들이 느끼는 괴리감― 출생국과 생활국이 다른 경우 발생하는 관습적 괴리, 시간이 오래 지남에 따라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하는 감정을 말하기도 해. 조금 쉽게 설명하면 세계 2차대전이나 한국전쟁 당시 일본에 강제노역을 당한 재일한국인과 재일교포 2세, 3세를 생각하면 돼. 일본에서 나고 자라 한글 이름도 있고, 한국어를 배운 한국인이지만, 한국, 일본 어느 쪽 국민으로도 인정받지 못하거나 자신의 정체성이 두 국가 중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경우를 떠올리면 좀 이해가 빠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LGBTQ에서는 자신이 생각하는 성별과 신체적인 성별이 달라 발생하는 괴리감을 함께 포함하여 말하기도 해.
최근 한국에서는 결혼이주여성이 증가함에 따라 디아스포라 이슈가 증가해야 맞는데 아직은 그렇지 않아. 아마도 한국보다 경제적으로 부흥하지 못한 국가에서 (가부장제)결혼을 통해 이주한 '여성'(그러니까 총체적으로 사회적 약자에 속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슈가 전혀 되고 있지 않는 것 같아서 좀 씁쓸해. 농협 하나로마트에서는 원래 외국 생산(외래품종) 농산물은 안 팔거든? 근데 지금 군 단위 농협 하나로마트에서는 바나나 등 이주여성을 위해 외래품종 농산물을 팔기도 해. 농협 하나로마트의 이 유연성이 그들에게 마음의 안정을 전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글방 1주째와 2주째에는 사실 좀 어색했어. 뭔가 내가 끼어서는 안 되는 자리에 낀 것 같다고 해야 하나? 다들 너무 깊은 생각과 혜안을 가진 친구들이 많았어. 내가 있어서 좀 이상해 진 게 아닌가? 나라는 존재가 이질적이고 어색하지 않나? 이런 생각을 했어. 하지만 이런 이질감과 균열도 누군가에겐, 그래 적어도 나에게는 도움이 되겠지 싶어서 잘 참여해야지 생각했어. 첫 주에는 정말 '내가 있어도 되는 걸까?'라는 생각을 정말 많이 했던 것 같아.
글방에서 어려웠던 일은 누군가의 글에 '감상평'을 남기는 일이었어. 글 쓰는 일은 14년간 해온 일이라 어렵지 않았는데, 누군가의 글에 감히 감상평을 남기는 일이 나에게는 너무 어려웠어. 내가 왜 이렇게 감상평을 남기는 게 어려울까 생각하다, 내가 글을 읽고 이해하는 데 그치기 때문이라는 걸 알았어. 글을 읽는 법과, 단어의 뜻, 문장의 호응과 재미있는 압운도 다 이해하고 감탄하는데 그 이상이 없기 때문이라는 걸 알았어. 그래서 합평이 있는 날이나, 쪽글에 댓글로 감상평을 달 때는 항상 글방 친구들의 글을 적어도 두 번 이상 읽었어. 어떻게든 그 이상을 느껴보고, 말해주고 싶었거든.
글감 주제로 '말이 안 되는 이야기'가 정해진 글방 3주째. 글감을 듣자마자 소재가 하나 떠올랐고 갑자기 너무 즐거워졌어. 글을 순식간에 써 내려가는 순간,
낯설지만, 그렇다고 꼭 낯설지만은 않은 감각이 돌아왔어. 손끝 살포시였고, 몰래 봄이 온 것 마냥 사철나무에 연하디연한 새순이 돋아난 것 같은 그런 티 나지 않은 수준의 감각이었지만, 낯설지 않은 감각이 돌아왔어.
나에게 백중사리라는 단어가 그날 다시 돌아왔어. 그리고 그날 '글자를 매개로 치유한 나의 이야기'를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너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어.
2023년 4월 29일
누나가
추신: 이 글은 너에게 쓰는 글이지만 너는 읽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만 읽는 글이야. 그들에게 이 말을 전하고 싶어.
나와 같은 증상이 있는 사람들이 '정신의학과에 와야 할 사람은 오지 않고, 그들에게 피해를 본 사람만 온다'는 말을 기억했으면 좋겠어. 적어도 나, 그리고 당신은 지금의 문제, 당면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떻게든 노력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 심리상담을 받고, 정신의학과에 방문하여 진단명을 받는 것은 그런 의미라고 생각해.
우울증을 직면한다는 것은 당신이 나약하거나, 우울에 졌기 때문이 아니라고, 우울함을 이겨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어. 우울하다고, 우울증을 직면한다고 해서 '약점'이 생긴 게 아니라는 걸 말해주고 싶어. 네가 잘 전해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