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어떤 치유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공이 May 07. 2023

에너지의 재분배

글자를 매개로 하는 어떤 치유

내 동생에게


이제 5월이야. 네 생일이 있는 그달.

너는 알지 모르겠지만, 항상 엄마랑 아빠는 너와 내 생일을 헷갈리곤 해.

나는 8월 24일이고, 너는 5월 24일이잖아. 엄마랑 아빠는 종종 나에게 '니가 5월이냐? 8월이냐?'라고 묻곤해. 그럼 내가 나는 8월이고, 네가 5월이라고 말해주지.


가끔 네 생일이 되면 먹먹해져. 너에게 제대로 된 선물 하나 못 해줬던 것도 생각나고, 누나답게 너를 돌보지 못했던 것도 생각나. 그래서 네가 태어난 5월과, 그리고 얄궂게도 네가 떠난 8월 22일쯤에는 조금 적적하고 아주 우울해.


5월. 벌써 정신의학과에 다닌 지 3개월이 되었어. 지금까지 12주나 치료를 받았어. 12주 동안 꾸준히 치료받은 나 자신이 대견하면서도, 12주 동안 달라진 게 많이 없는 것 같아 속상하기도 해.


2월에 처음 정신의학과에 갔을 때 이런 말을 들었어

'중증 우울증', '실행 가능성이 낮은 자살 충동'

첫 진료를 받기 전 몇 가지 설문지를 작성했는데 사실 뭐 뻔한 문장들이지. 여기서 문장 형태나 단어가 다르고 동일한 질문에 모순 없이 대답하고 있나 그런 걸 체크하는 용도였겠지. 대충 무슨 의도인지도, 무엇을 위한 것인지도 알 것 같은 설문지이지만 하여튼 내 나름대로는 지금 드는 생각들을 열심히 체크했어. 물론 어디에도 해당하지 않은 것들이 있어서 조금 버벅댔지만 말이야. 조금 심각한 우울증 판정이 나올 줄 알았더니 중증 우울증이라고 했어. 막상 '중증 우울증'이라는 듣고 나니 조금 충격이었어.


초기 우울증이 있고, 경증, 중증 위험 그다음이 중증이라고 하더라고. 차마 '중증 우울증 다음엔 뭐가 있나요?'라고 묻고 싶었지만, '없다'라는 대답이 나올 게 뻔해서 묻지 않았어.

근데 그 와중에 '실행 가능성이 낮은 자살 충동'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병원 이름이 적힌 약봉지를 손에 쥐고 한번 실행해버려? 하는 반항심이 잠깐 생기긴 했어. 의사가 '실행가능성이 낮다'고 판단 한 것은 '어떻게 죽으려고 생각했냐?'라는 질문에 내가 대답했고, 그걸 듣고 '실행 가능성이 낮다'고 말한 거야. 근데 내가 대답한 내용은 여러모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천장이 조금은 낮은 우리 집에서는 성공할 방법이 몇 없기에 내가 생각한 최적의 시나리오였거든. 이놈의 의사가 뭘 모르더라고. 그래서 확 실행해 버릴까 생각도 했어. 우리 집엔 실행할 만한 도구들이 이미 있었거든. 근데 실행하기에는 두려운 게 있었어. 실패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 줄까 봐. 그게 너무 두려웠어.


실패하면 너무 많은 것이 뒤틀리게 될 거야. 내가 중증 우울증을 앓고 있다는 것을 엄마나 아빠가 알게될 거고, 나는 자살을 실패한 자식이 되겠지. 자식 둘 다 먼저 죽어버린 비운의 부모가 될 뻔했으니 더욱더 나를 보호의 틀로 옭아매겠지. 그리고 나와 친하게 지냈던 사람들이 '그때 말을 들어줄걸', '그때 만나서 이야기해 볼 걸'이라며 각자 상처를 안고 살아갈 것을 생각하니 실행하기가 막상 두려웠어.

다음 편지들에서 이야기하겠지만, 최근 9개월간 물심양면 나를 도와준 사람들이 있거든. 그 사람들이 고작 나 때문에 상처받는 게 너무나 싫더라고. 그래서 누가 보면 '네, 다음 변명~'이라고 할 정도로 시답잖은 이유지만, 나에게 너무나 큰 이유였기에 충동을 실행으로 옮기지 못했어.


중증 우울증이라는 무거운 말과 실행 가능성이 낮은 자살 충동이라는 가벼운 말과 함께 의사가 나에게 설명해 준 게 있어. 원래 정신과의사를 믿지는 않지만, 굉장히 무미건조하게 설명을 해주는 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렇게 고깝지는 않았나 봐. 여전히 진료 시간은 나에게 고통스럽고, 제발 약만 처방해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말이야.

나의 우울은 만성적이래. 너무나 오랫동안 고질적으로 우울했고 그게 각종 단계를 넘어 중증 우울증이 되었다고 하더라고. 나도 나의 우울증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으니 사실 놀랄만한 일은 아니었어.

생활하면서 사용하는 에너지는 종종 감정을 억누르는 역할도 한대. 나의 경우는 계속 우울함을 억누르기 위해 많은 에너지를 사용했다는 거야. 이 말을 들었을 때, 내가 우울증이 있다라고 말할 때마다 '에이~ 네가?'라고 했던 사람들의 목소리들이 생각났어. 내가 어떻게든 우울함을 타인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에너지를 쓰고 있었다는 걸 남의 입으로 듣고 깨달았어.


우울 증상이 있던 것도 오래됐고, 사회생활도 오래 해서 내가 잘 숨기며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내 안에서는 사실 엄청난 에너지를 사용하면서 우울을 억누르고 있었던 모양이야.

'영원한 건 절대 없어'라고 너와 동갑내기 가수가 노래 불렀던 것처럼, 이제는 내가 나이가 들어서인지 어쩌다가 에너지가 고갈되었는지는 몰라도, 우울을 억제하기 위해 분배되는 에너지가 적어지거나 사라졌대. 그래서 갑자기 우울함이 확 올라왔다는 거야. 일단 출근하거나 일상을 살아내는 게 나에게는 우선이니까(밥을 먹는 행위에도 에너지가 들지) 우울에 배정되어야 하는 에너지가 총량 부족으로 인해 배정되지 못해 작년에 불쑥 심각한 우울이 찾아온 것 같대. 그때 어찌저찌 그동안 우울함과 더불어 산 노하우로 잘 지내오고, 그게 좀 버거울 때 심리상담을 시작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게 된 것 같다고 했어.


덧붙여 만성적인 우울증이라고도 했어. 그래서 우울을 수용하거나 억누르는 데 맞추어 성격이 형성됐을 수도 있다고 하더라고.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고(내 담당 의사 방 구조가 좀 짜증 났었거든. 왜 정리가 안되어 있을까 하고), 병원을 나와 집에 가는 길에 이런 생각이 들었어.

'지금 내 성격이 원래 성격이 아닐지도 몰라'

성격이라는 게 원래 태어날 때 성정이나 집안 환경, 커가면서 접하는 환경에 따라 달라지긴 하지만, 만성적인 우울로 성격이 맞춤 제작되었다는 뉘앙스의 말을 들으니까 원래 내 성격이 문득 궁금해지더라고.

근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우울증 전에는 성격이 더 안 좋았던 것 같아서 딱히 원래 내 성격은 어땠을지 상상하는 걸 그만뒀어.


지금 다시 우울이 올라오는 중이라서 폭식하고 있어. 정신의학과에 가기 전까지 나는 폭식을 자주 했어. 허기짐이 계속 안 사라져서 목까지 차오를 때까지 먹는 그런 폭식은 아니고, 폭식할 기세로 특정 음식에 집착을 엄청나게 하는 폭식이었어. 나는 평소 식욕도 없고, 먹고 싶은 음식도 없는데 '이 음식, 지금 먹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하면서 음식에 집착하는 바람에 돈이 없었는데도 음식을 배달시켜 먹었어. 정말 먹고 싶어 미칠 것 같아서 주문한 음식을 한두 숟갈 먹고 안먹을지언정 시키지 않으면 안정이 안 됐었거든.

의사 말로는 이게 자살에 대한 생각을 막기 위해 몸이 본능적으로 한 방어 행동인 것 같다고 하더라고. 뭐라도 먹여야 했나 봐. 다행히 병원에 다닌 처음 1달간은 약을 먹기 시작해서 그런지 음식에 집착하는 버릇은 사라졌어. 요즘 우울해져서 다시 올라오고 있지만 말이야. 

오늘도 떡볶이를 먹지 않으면 큰일 날 것 같아서 한두 숟갈 먹었더니 마음이 평안해졌어.



2023년 5월 7일

누나가



추신: 어제인가 그제 꿈에 네가 나왔어. 근데 네가 말을 했어. 무언갈 하고 싶다고. 너는 나에게 얼굴을 끝까지 보여주지 않았지만, 나에게 또박또박 제대로 된 문장으로 말을 했어. 그건 너였을까? 아니면 너를 가장하고 나를 괴롭히는 귀신이었을까? 왜냐면 너라면, 아니 내가 생각하는 너라면 절대 하지 않을 말과 부탁이었거든. 요즘 약 부작용으로 꿈을 계속 꾸는데 가족들도 나오고 너도 나오고, 꿈속에만 있는 우리 집이 나오곤 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