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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미가 Jun 29. 2022

글쓰기로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법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상처에 대해 쓴다는 건




이제 막 피어난, 티 없이 아름다운 꽃이나 보송한 얼굴로 활짝 웃으며 뛰노는 아이들을 볼 때면 기쁨과 슬픔이 동시에 찾아오는 걸 느낍니다. 언젠가 꽃은 꺾이거나 시들고, 아이들은 철이 들고 상처 받을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순수한 마음은 배신당하고, 상처에는 흉이 질 것입니다. 그것이 삶이라는 것을 우리 모두 알고 있지요. 사는 내내 단 한 번의 상처도 받지 않고 보호받는 삶을 사는 건 온실 속의 화초, 유리 상자 속의 인형일 뿐이니까요. 


이 글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그런 당신의 상처를 위로하고 연민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특히 당신이 글 쓰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그 상처를 글로 쓰려고 마음먹었다면  이 절대적 명제 하나만큼은 확실하게 명심하고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당신의 상처는 결코 특별한 것이 아니다. 




내가 겪은 아픔과 절망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 내 앞에서 속없이 웃고 있는 친구, 세상 모든 걸 깔아보는 것 같은 교수님, 시종 지루하게만 보이는 부모님마저도 삶의 어느 순간엔 인생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충격적인 사건을 경험하거나, 지독한 절망을 겪어냈을 겁니다. 그것을 극복하고 잘 살아가고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지만요. 


우리 모두는 참으로 연약한 존재로 태어나 험난한 세상을 살아갑니다. 살아남는 과정에서 많은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겠지요. 그렇다고 하여 당신이 받은 그 상처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닙니다. 모두가 아프게 살아간다고 하여 내 상처가 아프지 않은 건 아니니까요. 내가 겪은 고통과 충격은 실존적인 것이고, 오롯이 나만이 느끼는 것이지요.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게 힘들게 살아. 너만 힘든 거 아니야’라는 뼈아픈 충고가 위로로 들리지 않는 이유입니다. 



다시, 당신의 이야기로 돌아가 볼게요. 당신의 삶은 최근에 벌어진 어떤 사건에 의해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습니다.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치가 떨리고, 심장이 조여 오는 것 같죠. 외부적인 상황은 다 정리되었고, 걱정하는 지인들에게 겉으로는 “괜찮아”라고 말하게 되었지만, 속으로는 전혀 괜찮지 않다는 걸 스스로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상처를 에세이로 승화시켜 극복해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간략하게 과정을 썼지만, 여기까지 오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큰 용기와 결심이 필요합니다. 그 지독했던 시간을 상기하는 것만으로도 글 쓰는 동안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죠. 그렇게 써진 글은 아마도 굉장히 거친 상태일 겁니다. 조금 시간이 지나서 읽어보면 내 글인데도 ‘읽기 힘들다’고 느껴질 정도일 거예요. 당연하죠. 그 글은 나의 내면에서 소화되지 않은 어마어마한 감정들을 그대로 토해놓은 증거이니까요. 남에게 보이긴 조금 창피하겠지만 괜찮습니다. 덕분에 속은 시원해졌잖아요.(덜 토했다면 아직도 속이 메슥거릴 수도 있겠네요). 믿을 만한 친구가 있다면 보여주고, 토닥토닥 옆에서 등을 두드려달라고 해도 좋습니다. 



이게 제가 생각하는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글쓰기의 1단계입니다. 토해내듯 쓰기.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걸러내지 말고, 누가 나를 어떻게 볼까 두려워하지 말고, 경주마가 전력질주 하듯이 와다다다다다 키보드를 내려치기. 이 단계에서는 단지 그것만으로도 마음속의 응어리가 일부분 해소되는 것을 느낄 수 있어요. 하지만 상처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고, 누군가가 건드리면 역시 아픕니다. 다시 그 고통이 상기되죠. 아마 1단계의 글을 본 다른 사람의 반응 자체가 또 다른 상처로 돌아올지 모릅니다. 네, 제가 바로 경험자입니다. 아물지 않은 상처를 그대로 외부에 노출시키는 게 더 위험한 일이라는 것을 그땐 몰랐죠. 덧날 수도 있으니까요.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갈 차례입니다. 1단계 글쓰기에서 자신의 상처를 직면하는 경험을 해봤다면, 아주 조금은 다른 사람의 상처를 들여다보는 일이 가능해집니다. 내 이야기를 듣고 다른 이들도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줄 수도 있겠지만 특수한 모임이 있지 않는 한 그런 경우는 드물고, 우리가 아는 가장 쉬운 방법이 있잖아요. 바로 ‘독서’죠. 세상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상상도 할 수 없는 엄청난 고통을 겪고 그것을 책으로 기록했는지 알면 깜짝 놀라실 거예요. 도서관에만 가도 정말 많은 책을 찾아볼 수 있을 겁니다. 록산 게이의 <헝거>, 마이클 길모어의 <내 심장을 향해 쏴라>, 모드 쥘리앵 <완벽한 아이> 등 저의 최애 논픽션을 추천합니다. 비교할 바는 못 되지만 제가 쓴 <조금씩 천천히 페미니스트 되기>도 용기 내어 트라우마를 고백한 책이랍니다. 1단계를 거치지 않으면 이런 책들을 읽는 게 사실 쉽지 않습니다. 설명할 수 없는 불편한 감정에 휩싸이거든요. 1단계 글쓰기를 해냈다 해도 읽기 힘들 수 있는데, 적어도 그 감정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바라볼 수 있게 되죠. 이 때, 책 리뷰를 쓰면서 책을 읽고 떠오른 자신의 경험과 감정을 찬찬히 기록하는 게 큰 도움이 됩니다. 






자, 1단계와 2단계를 거치는 동안, 아마 당신은 눈앞에 주어진 삶을 사는 데도 열심이었을 테죠.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다면 아픔이 희석되는 느낌이 들지도 몰라요(시간이 약이라는 말이 허튼소린 아니죠). 이제 3단계로 넘어갈 차례입니다. 


3단계에서는 앞서 말한 필수 명제를 다시 떠올릴 시간입니다. 



내가 받은 상처는 특별한 게 아니다. 




이 말을 다르게 표현하면, ‘내가 받은 상처는 당신도, 그 누구도 받을 수 있는 상처다.’가 됩니다. 만약 당신이 이걸 깨달았다면, 어쩌면 당신의 상처는 꽤 멋진 훈장 같은, 당신의 일부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상처 받은 나’를 그대로 세상 앞에 내보일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이겠지요. 내 상처뿐만이 아니라 타인의 아픔에 연민할 줄 알게 됩니다. 내 이야기를 타인과 공유하고, 타인의 이야기를 다시 내게로 흡수할 수 있게 되고요. 

이러한 3단계에서 다시 글을 쓰게 되면, 분명 같은 사건을 이야기하고 있음에도 1단계와는 전혀 다른 글이 되어있을 겁니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은 글이 되어있을 겁니다. 나와 비슷한 상처를 겪은 누군가가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을 받게 되길 간절히 바라게 될 거예요. 그리고 그건 당신이 비로소 진정한 ‘에세이스트’가 되었다는 증거일 테지요. 


한때는 그런 생각을 한 적도 있었습니다. 가능하다면, 피할 수 있었다면, 상처 따위 받지 않고 살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아픈 만큼 성장한다는 건 알지만, 고통의 기억이 사람을 위축시키는 면도 분명히 있으니까요. 비교적 온실 속 화초처럼 자라 구김살 없는 친구를 보면 부러움을 넘어 질투에 가까운 감정을 느끼기도 했고요. 

하지만 글을 쓰면서 나의 구김살을 하나하나 펴는 시간, 그 시간 속에서 태어나는 새로운 에피소드와 인연들이 있다는 걸 압니다. 당신의 상처를 글쓰기로 완벽하게 극복할 수 있다고는 장담하지 못하겠지만 극복하지 못하더라도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그렇게 우리 서로를 토닥이면서 함께 써요.


글_홍아미 





P.S.

알기 쉽게 쓰려고 굳이 단계를 들먹여가며 정리했는데요. 아시죠? 세상사 모든 일이, 특히나 글쓰기가 단계별로, 순서대로 진행되는 일은 좀처럼 없다는 걸요. 한 마디로 요악하면 ‘읽고 써라’라는 이야기네요. 지금 저도 그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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