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후반부를 시작하며
Today’s route ★★☆☆☆
베르시아노스Bercianos del Real Camino → 렐리에고스 Reliegos 21km
렐리에고스Reliegos → 레온León 24km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기 시작한 지 벌써 3주가 훌쩍 지났다. 언제 이렇게 시간이 흘렀나 싶다. 매일 새벽같이 일어나서 하루 몫의 거리를 걷고, 오늘 묵을 잠자리를 찾고 또 다음 날 걸을 준비를 하고……. 이 단조로운 일상이 이제 더 이상 낯설지가 않다. 하루가 단순해지니 내면도 단순해진다. 걷기, 먹기, 자기. 이 세 가지 외에 나의 관심을 끄는 일들이 거의 없다.
생장에서 787km 표지를 보며 출발한 게 엊그제 같기도 하고, 까마득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순례길에는 산티아고 대성당까지 남은 거리가 표시된 표지석을 수시로 만날 수 있다. 노란 화살표와 가리비 문양과 함께 음각으로 새겨져 있는데, 이걸 볼 때마다 내가 길을 잘 가고 있다는 안심 같은 걸 느끼곤 한다.
그렇게 남은 킬로수가 점점 줄어들수록 나는 순례길에 더욱 깊숙이 들어선다. 700km에서 600km대, 500km대에서 400km대로……. 사아군에서 전체 프랑스길의 절반 지점을 지난 후부터는 300km대를 걷고 있는데 남은 킬로수가 급격하게 줄어드는 게 아쉽게 느껴질 정도였다(초반엔 아무리 가도 가도 거리가 줄어드는 것 같지가 않았는데 말이다). 여행 초반에 날 괴롭혔던 발가락 물집은 이제 대부분 아물어가고 있고, 두드러기도 희미하게 자국만 남게 되었다. 매일 저녁 안티푸라민 연고로 종아리와 발 마사지를 하고 아침에는 발가락 사이에 바셀린을 꼼꼼히 바르는 것도 일종의 루틴이 되었다. 또 하나 달라진 점. 이제 함께 걷는 사람들이 생겼다는 것이다.
제대로 말하면, 한 팀을 이뤄 여행하던 라나와 민지, 형우가 혼자 다니던 나를 거둬 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삼십 대의 나이인 세 사람은 각자 세계여행을 하던 중 이집트 다합에서 장기 투숙을 하게 되었고, 거기서 가족처럼 지낸 사이라 했다. 하지만 사아군에서 형우와의 우연한 만남 이후 그들의 권유로 나는 한동안 여정을 같이 하기로 결정했다. 레온에서 아파트를 빌려 연박을 할 계획인데 4인 정원이라 숙박비를 셰어 하면 딱 좋겠다는 계산이었다. 나도 어차피 레온에서 하루 더 머물며 휴식을 취할 예정이었으므로 아주 적절한 타이밍에 좋은 친구들을 만난 셈이었다.
사실 이전에도 누군가와 함께 걷기도 하고, 밥을 같이 먹기도 했으나 매일 같은 숙소를 예약하고, 함께 저녁을 만들어 먹는 건 또 다른 느낌의 소속감을 선사해 주었다. 함께 걸으며 장난도 치고, 노래도 부르고, 이런저런 고민이나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좀 지친다 싶으면 초콜릿이나 캔디를 나눠먹기도 하고, 이어폰을 나눠 끼고 음악을 함께 듣기도 했다.
매우 감동적이었던 베르시아노스의 기부제 알베르게를 나올 때는 자원봉사자 할아버지와 함께 포옹하며 단체 사진을 찍기도 했다. 이때부터 내 사진첩에는 단체 사진이 꽤 많아졌다.
베르시아노스 다음 도시는 렐리에고스라는 오래된 마을이었다. 좋게 말하면 역사적인 느낌이 강한 도시였고, 나쁘게 말하면 낙후된 시골마을이었다. 날은 계속 흐리고 비가 내렸다. 할아버지 혼자 운영하는 듯한 오래된 공립 알베르게는 시설은 좀 아쉬웠지만 그래도 갖출 건 다 갖춘 곳이었다. 특히 요리가 가능한 주방이 있다는 게 꽤 큰 메리트였다. 이 팀의 요리사인 형우가 두 팔 걷어붙이고 라면과 볶음밥을 뚝딱 만들었다.
혼자 여행할 때는 이렇게 따뜻한 음식을 먹을 수가 없다. 운 좋게 괜찮은 식당을 찾을 수 있다면 사 먹을 수 있지만, 대부분은 슈퍼에서 산 빵 쪼가리나 삶은 달걀 정도로 허기를 채울 뿐이다. 나를 팀에 끼워주고, 이렇게 따뜻한 음식을 만들어서 대접해 주는 동생들이 나에겐 까미노 천사들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여럿이 같이 움직인다는 게 장점만 있는 건 아니다. 서로서로 맞춰줘야 하는 부분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런 도보여행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여러 명 중에 한 명만 컨디션이 안 좋아도 나머지 인원의 일정에 차질이 생기기 마련이다. 처음 닥친 문제는 형우의 발 컨디션이었다. 젊은 혈기를 믿고 초반에 너무 무리했던 형우는 발바닥에 꽤 큰 물집이 잡혀 부르고스 구간을 버스로 이동해 며칠 휴식을 취한 터였다. 하지만 그게 완전히 낫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렐리에고스 알베르게에서 다시 살펴보니 단순한 물집이 아니라 염증까지 생긴 것 같았다. 간호사 출신인 라나가 레온까지 걷는 건 무리라는 진단을 내렸다. 레온은 큰 도시라 병원이 있으니 2박 3일 머무는 동안 병원을 다니며 회복을 기대해 보기로 했다. 일단 레온까지는 택시와 버스를 타고 이동하기로 했다.
하지만 멀쩡한 다른 사람들까지 버스를 탈 필요는 없었다. 각자의 사정에 따라 일부 구간을 걷지 않고 탈 것을 이용해 이동하는 것을 ‘점프’라고 하는데 이건 사실 순례자로서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기도 했다. 어쩔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곤 대부분의 순례자들은 모든 구간을 걸어서 가길 원했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민지가 형우와 동행해 주기로 했고, 나와 라나는 걸어서 이동한 후 레온 숙소에서 다시 조우하기로 했다.
사실 컨디션이 안 좋기는 다들 마찬가지였다. 민지는 발목 통증, 라나는 무릎 통증 때문에 많이 힘들어하고 있었는데, 거기다 대면 나의 발가락 물집은 정말 어디 내놓기도 민망할 정도로 작고 귀여운 고통이었다. 남자든 여자든, 나이가 많든 적든 순례길을 걷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저마다의 고통을 안고 있었다. 그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어서 우리 모두에게는 은은한 동병상련의 정서가 스며들어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렐리에고스에서 레온까지 걷는 길은 20킬로가 좀 넘었는데 다행히 날씨가 좋았다. 함께 피레네 산맥을 넘던 그날의 날씨와 비슷해서 라나와 단둘이 오랜만에 꽤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기차 안에서의 우연한 만남, 20일 넘게 이어진 신기한 인연, 형우, 민지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어느 시점부터는 라나의 걸음이 많이 느려졌다. 무릎 통증이 심해졌던 탓이다.
“언니 난 틀렸어. 먼저 가. 기어서라도 갈 테니까.”
라나는 죽어도 점프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지를 불태우며 거의 절뚝이다시피 걸었다. 나는 그저 라나와 걸음을 맞추고, 응원의 한 마디를 건네는 것 외에 옆에서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래도 장장 7시간을 넘게 걸어 겨우 레온 시내에 들어섰다. 팜플로나, 로그로뇨, 부르고스에 이어 네 번째 대도시를 만난 것이다. 레온을 지나면 전체 순례길의 1/3만을 남겨두게 된다. 여정의 후반에 들어서는 셈이다.
레온의 멋진 아파트에는 먼저 도착한 민지와 형우가 반갑게 우리를 맞았다. 정말 세련되고 예쁜 아파트였다. 형우는 무슨 한이라도 풀 듯, 정육점과 슈퍼마켓을 오가며 장을 잔뜩 봤다. 삼겹살을 굽고, 김치찌개를 끓이고, 한식 파티를 열었다. 4리터 들이 와인팩도 샀다.
저녁 6시에 시작된 우리의 파티는 밤을 지나 새벽이 될 때까지 끝나지 않았다. 순례길, 여행, 사랑, 가족, 일, 미래……. 정말 다양한 주제의 대화가 오갔던 멋진 밤. 아마 앞으로도 오래 이 밤을 기억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오늘의 알베르게
Albergue de peregrinos de Reliegos ★★★☆☆
1박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