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경렬 Sep 06. 2018

독서 드라이브

금정연의 ⟪아무튼, 택시⟫를 읽고


계속 쳐다본다. 룸미러가 아니라 CCTV다. 금이 간 살얼음처럼 실핏줄이 선 택시기사 눈동자가 계속 나를 감시한다. 수상하다. 느낌이 좋지 않다. 휴대전화로 112를 찍은 뒤 보조석 넘어 택시 정보가 적힌 스티커를 확인하기 위해 조심스레 목을 내밀었다. 그러자 택시기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손님, 죄송하지만 잠깐 갓길에 차를 세워도 될까요?” 


나는 너무 놀라서 “네!!?”하고 소리쳤다. 나보다 더 놀란 기사가 애써 흐느낌을 참으며 말을 이었다. 


“놀라게 해드려서 죄송해요. 손님이 제 딸과 너무 닮아서, 창피하지만 딸 생각에 눈물이 나서요. 그래서 잠시 차를 세우고 눈물 좀 닦고 가도 될지 여쭈어본 겁니다.” 


결국, 택시는 잠시 갓길에 세워졌다. 손님은 정선터미널에서 내렸고 기사는 극구 택시비를 사양했다.


이 에피소드는 2009년 경 내 부친이 모든 것을 내려놓은 채 속세와 단절하고 갱생하겠다는 포부로 강원도 평창에서 삼 개월 정도 택시기사 생활을 하던 중 2주 차에 생긴 일화다.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100개월은 지나야 가족과 해후할 것처럼 분위기를 잡았던 부친이 무슨 연유로 100주는커녕 100일도 되지 않아 복귀했는지는 여전히 미스터리다. 그래도 모든 것을 버리겠다는 다짐은 일말의 성과가 있었다. 평창 숙소에 개인용 전기밥솥, 버너, 자잘한 식자재를 전부 버리고 왔으니까. 이후 한 2~3년 동안 주기적으로 부친에게 ‘갱생기’가 찾아왔는데 그럴 때면 엄마는 내게 인터넷에서 중고로 제일 싼 가격의 전기밥솥을 알아보라고 말했다. 그러면 나는 ‘차라리 햇반 200개가 경제적’이라며 엄마를 타박했다. 


⟪아무튼, 택시⟫ 52쪽 인용문을 읽다가, 내 부친도 어쨌든 택시기사였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수상쩍은 운전사가 자기 전화번호를 주거나, 죽은 여자 친구를 닮았다고 하거나, 주소를 외우려고 천천히 반복해서 말한 적 있어요?"


위 인용문의 출처가 궁금하여 찾아보니 넥플릭스 오리지널 애니메이션 시리즈 <보잭 홀스맨> 세 번째 시즌 에피소드에서 나온 대사인 듯하다 (출처 좀 밝혀주지 독자가 이렇게 찾게 만들고 말이야). 이 대사는 작가가 상상력이 빈곤한 자신을 반성하는 대목에서 비롯된다. 저자는 여자 혼자 택시를 탈 경우 택시기사에게 위협이나 괄시 받을 확률이  남자보다 월등히 높은 현실을 언급하면서, “자신은 남자라서 겪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있다는 사실을 상상할 수 있다는 사실조차 상상하지 못하는 남자 (51쪽)”라고 마침표를 찍었다. <보잭 홀스맨> 대사는 바로 그 다음 절에 택시와 관련한 상상력 예시로 나온 것인데, 이를 읽은 나는 불현듯 부친 생각이 났다.


<보잭 홀스맨>에선 운전사가 죽은 여자 친구를 들먹인 반면, 부친은 손님을 보고 너무도 건강한 딸이 떠올라, 그러니까 올해 나이 마흔에 셋째를 출산할 만큼 튼튼한 딸이 생각나서 눈물을 글썽였다. 까마득히 잊고 지냈던 부친의 직업과 ‘갱생기’가, 별 개연성도 없는 데다 작가가 출처도 밝히지 않고 인용한 55개의 글자를 보고 생각나다니. 이게 바로 ⟪아무튼, 택시⟫를 읽는 묘미였다.


⟪아무튼, 택시⟫를 읽다보면 작가의 예상치 못한 이야기 전개에 독자도 종종 전혀 예상치 못한 감정이나 기억 속으로 도착하게 된다. 이를테면, 32쪽에 택시를 자주 탄다며 잔소리를 하는 엄마에게 작가가 “내가 번 돈으로 택시를 타는데 그걸 가지고 뭐라 할 수 있나? 어렸을 때 택시를 자주 태워준 것도 아니면서?”라고 묻자 엄마가 “물론 타진 않았지. 버스 한 정거장거리만 돼도 택시를 타자고 졸라대는데 그걸 어떻게 타니?”하고 말하는 구절이 나온다. 자연스럽게 다시 추억택시가 내 앞에 섰다. 추억택시는 26년 전 엄마와 누나 그리고 내가 택시를 탔던 기억 속으로 데려다 주었다. 이번에도 ⟪아무튼, 택시⟫ 내용과는 별 상관없는 추억이다.


가파른 오르막길을 힘겹게 오르던 택시 안에서 뒷좌석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던 누나가 덜컥 문을 풀어버렸다. 엄마는 파리를 낚아채는 개구리의 혓바닥보다 빠른 속도로 택시 문을 잡아 당겼다.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엄마는 택시를 타고 온 시간만큼 누나를 혼냈다. 차라리 누나가 택시에서 굴러 떨어지는 편이 나았을 만큼 엄마는 누나의 등짝과 어깻죽지를 후려쳤다. 엄마가 내뿜는 살기에 몸을 벌벌 떨어대는 내 모습이 보이자, 저쪽에서 추억택시가 또 한 번 경적을 울렸다.


이번에 내린 곳은 1992년 우리 집 거실이다. 거실 한 가운데서 엄마가 펑펑 울고 있다. 당시부모님은 동두천시 보산동에서 체육용품 가게를 운영했다. 이날 아침부터 동대문 시장에 물건을 주문하러 갔다 돌아온 엄마는 외투도 벗지 않고 거실에 주저앉아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참았던 숨을 내뱉는 혹은 숨쉬기 위해 터진 울음 같았다. 엄마가 운 이유는 택시에서 두고 내린 30만 원이 든 봉투 때문이었다. 나중에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엄마는 잃어버린 돈보다 사지 못한 코트 생각에 그토록 눈물이 나왔단다. 거래를 마치고 동대문 시장을 구경하던 엄마는 누나 초등학교 졸업식 때 누나에게 입히면 참으로 예쁠 법한 코트 하나를 발견했는데 가격이 비싸서 몇 번이고 망설이다 그냥 포기한 채 돌아와야 했던 일이 생각나 대성통곡을 한 것이다. 


“우리는 모두 어딘가로 가려 한다. 물론 우리는 그곳이 아닌 지금 이곳에 있다. 여기와 저기. 그러나 저기까지 가는 길을 정하는 건 내가 아니다. 돌아 갈수도 있고, 아무것도 아닌 곳에서 길을 잃을 수도 있다. 심지어 전혀 다른 곳에 도착하기도 한다. 매 순간 우리는 원하지도 상상하지도 못했던 지점들을 지난다. 우리가 원하는 곳으로 가고 있기를 희망하면서······ 그것이 내가 기본적으로 바라보는 인생의 방식이다(85쪽)”


금정연의 ⟪아무튼, 택시⟫도 독자들을 어디론가 데려가 준다. 내가 정하지도 그렇다고 작가가 정한 곳도 아닌 어딘가를 지나다 보면 전혀 예상치 못했던 장소에 도착하기도 한다. 어쩌면 이게 바로 독서의 묘미가 아닐까.


“내가 어디를 향해 가는지 모를 때에도 택시는 불을 밝힌 채 오가고 있다. 그것이 꼭 나를 향한 것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나는 그중에 한 대를 만날 것이다. 그런 생각은 나에게 도움이 된다(130쪽).”


‘왜 이 책을 샀지?’ 싶을 때가 종종 있다. ⟪아무튼, 택시⟫도 딱히 구매할 이유는 없었으나 결국 난 독서드라이브를 하게 됐다. 나는 멋진 작가를 만난 것이다. 이런 책은 나에게 도움이 된다.


*동두천  동네책방Cornerstool - 코너스툴 매거진  ⟪구석진⟫에 실은 글 입니다.  



작가의 이전글 <어느 가족>에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