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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묭묭 Nov 15. 2019

“내가 바람의 열두 방향으로 끝없는 길을 나서기 전에”

어슐러 K. 르귄, 『바람의 열두 방향』, 시공사, 2004

솔직히 이 단편집의 각각의 단편들에 대해 얼마나 이야기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대신 내가 할 수 있는 건 본 단편집의 제목이 된 시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결국 ‘바람의 열두 방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닿아보는 정도일 것 같다. 르귄은 A. E 하우스먼의 「슈롭서의 젊은이」라는 시를 인용하며 본 책을 연다.


머나먼 곳, 밤과 아침과

열두 번의 바람이 지나간 하늘을 넘어

나를 만들기 위한 생명의 원형질이

이곳으로 날아오고, 여기에 내가 있네.


이제, 숨결이 한 번 스치는 동안 나 기다리니

아직 산산이 흩어지지 않은 지금

내 손을 얼른 잡고 말해 주오.

당신 마음에 품고 있는 것들을.


지금 말해 주오, 내가 대답하리니.
어떻게 도와줄 수 있는지, 말해 주오.

내가 바람의 열두 방향으로

끝없는 길을 나서기 전에.

- A. E 하우스먼,「슈롭서의 젊은이」


시에서 ‘나’를 만든 것은 “생명의 원형질”이다. 이 원형질은 “밤과 아침 그리고 열두 번의 바람이 지나간 하늘을 넘어” 이곳, 즉 여기에 왔다. 이것이 내가 여기에 있는 까닭이다. 나는 이곳에서 당신이 마음에 품고 있는 것을 말해주기를 기다린다. 다만 기다리는 시간에는 제한이 있다. 당신은 “숨결이 한 번 스치는 동안”, 그 숨결이 산산이 흩어지기 전에, “내가 바람의 열두 방향으로 끝없는 길을 나서기 전에” 말해주어야만 한다. ‘나’는 바람, 숨결, 그리고 그 생명 자체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나’는 이곳으로 날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흩어져 날아가기 전까지만 이곳에 머무를 수 있다. 당신은 이런 생명을 앞에 두고 마음에 품은 어떤 말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이건 나중의 이야기다.


열두 번의 바람이 지나간 하늘, 바람의 열두 방향은 비슷한 의미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때 열둘이라는 숫자는 이런 것들을 연상시킨다. 열두 달, 그 열두 달이 속한 모든 계절, 밤에 속한 열두 시간, 아침에 속한 열두 시간, 그 두 번의 열두 시간을 모두 포함하는 하루. ‘나’는 이런 바람의 열두 방향을 향해 끝없는 길을 떠난다고 말했다. 이때 “바람의 열두 방향”은 분명 공간적 방향이다. 지금껏 생명의 원형질들이 지나쳐온 땅들이다. ‘나’는 방향으로 길을 떠나는 것이기 때문에, 동시에 그 열두 방향에 동시에 존재할 수도 있다.


이 지점에서 “바람의 열두 방향”은 공간적 방향일 뿐만 아니라 시간적 방향으로도 전환된다. 열두 달, 열두 시간, 그 모두를 포함한 모든 시간에 ‘나’는 존재할 수 있다. 내가 여행을 떠나는 건, 모든 공간 그리고 모든 시간, 그리고 그게 동시에 이루어진다. 그런 것이 생명의 이야기다. 그렇기에 길은 끝없다. 생명에 끝이 없는 것처럼.


생은 끝난다. 그러나 생명은 끝나지 않는다. 생은 ‘생명’의 의인화이므로. 죽음이 끝으로 인식되는 것은 생명이 의인화되었기 때문이다. 의인화되지 않은, 생명의 관점으로 보았을 때 죽음은 끝이라고 할 수 없다. 르귄이 「혁명 전날」이라는 단편에 적었듯, “죽는다는 것은 단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바람이 방향을 바꾸는 것과 같다. 그것은 바람의 끝을 뜻하는가? 바람은 끝나는가?


바람의 열두 방향이라는 제목을 가진 이 단편집은 그렇기에 먼 과거, 현재, 먼 미래를 이야기한다. 현실에 존재하는 나라, 현실에 없는 나라, 우주에 있는 아직 모르는 곳을 이야기한다. 그게 의식을 가지지 않은 식물이나 나무일지라도, 생명을 가진 것들에 대해 적는다. 그 시간들, 그 공간들에서 그들은 조화를 추구하고, 빛을 찾고, 본질을 탐구하고, 어둠 속에서 손을 내밀며 그 손을 잡기도 하고, 앞으로 나아간다. 결국 자신을 어딘가에 내던진다. 사랑이다. “보잘것없는 인간 하나하나의 뇌가, 별과 은하의 형태를 인식해 사랑으로 번역해 내잖아요.” (「제국보다 광대하고 더욱 느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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