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관의 변화와 개인의 이야기
나의 외할아버지는, 로마의 휴일을 보고 감명 받아 첫째딸(우리엄마)의 머리를 오드리헵번처럼 자르고, 기타치며 딸들에게 노래를 불러주고, 중국 역사를 취미로 하던 낭만적인 아버지였다. 그리고 나에게는 낭만적이면서도 통찰력에 자주 놀라게 하는 할아버지였다.
이번에 외할아버지께 외할아버지의 인생 이야기를 해달라,고 부탁해 항상 마음 속 한 켠으로 궁금했던 외갓집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한국의 근현대사를 동시에 보았다.
"전남대에서 교수가 되고 첫째 딸을 낳았어. 엄청 예뻤어. 둘째 딸을 낳았어. 또 엄청 예쁘더라고. 근데 너희 증조 할아버지 할머니가 인상을 쓰기 시작했어. 셋째를 낳았어. 또 딸이었어. 그러니까 집이 난리가 났지....... 전남대에서 이런 말이 돌았다. 그 교수 처장네 집은 문 닫았다. 아들이 없다더라. 형편없는 사람이다. 그 때는 그런 시절이었어. 아들이 있어야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시절이었어. 내가 그런 말을 듣고 기분이 어땠겠냐. 부모님이 아들을 낳으라고 재촉했어. 내 의지대로 할 수 있었다면 난 그 때 멈췄을 거여. 난 딸도 상관 없었어. 그렇게 해서 결국 여섯째에 아들을 봤어. 그래서 너네 할머니도 지금 몸이 그렇게 안 좋은 거야, 애 많이 낳느라고. 고생했지.
어느 날 대학 회식을 갔는데 일하던 처녀가 나보고 애가 몇이녜. 그래서 여섯이라고 했더니 그 처녀가 그러더라. '교수님은 좀 야만스럽네요.' 그 때 정부가 애 둘만 낳자고 운동을 시작하던 때 였어. 시대가 변했어. 어쩌겠냐 이미 낳았는데.....
('외삼촌에게 가업 -한약방- 을 물려준다거나, 외할아버지의 공부 - 경제학, 통계학 - 을 잇게 할 생각은 없었나요?')
절대 없어. 너희 외삼촌 흉 좀 봐야겠는데...... 너희 외삼촌은 공부를 안 했어. 공부를 시키려고 하면 너네 증조 할머니가 '애헌테 공부를 왜 시키냐! 씨만 져놓으면 됐지! 이 집안 재산 다 얘 껀데, 색시만 데려와서 씨만 지면 됐는데 공부를 왜 허냐!' 이러셨어. 아주 대단한 사람이다 너희 증조할머니가. 이러는데 애가 공부를 하겠냐? 그래서 난 애초에 기대를 안 했어. 증조할머니는 첫째딸(우리엄마)도 장손이라고 아주 예뻐했어. 너희 증조는 나머지 딸들, 니네 이모 보고 뭐라고 했는지 아냐. 씨잘데기 없는 년들이라고 했어. 씨잘데기없다고.... 그래서 내가 너희 엄마랑 외삼촌을 제일 많이 혼내면서 키웠어. 아직도 만나면 내가 혼내잖어. 그 둘이 제일 말을 안 들어.”
“내가 애가 여섯이잖어. 근데 그 중 넷이 재수를 했어. 그러면 대학입시가 열 번이지. 그리고 또 뭐냐. 애들 결혼해야지. 결국 내가 몇 번의 decision-making을 한 거냐(할아버지가 정말 decision-making이란 단어를 쓰셨다). 난 그래서 이제 결정이 지겨워. 난 결정에 질렸어. 내가 식단 써놓은 거 봤지?(외할아버지는 일주일의 식단+간식을 표로 써놓고 정확하게 그렇게 드신다) 결정하기가 싫어서야. 뭐 먹을까 결정하기도 싫어."
"중학교 때 영어 선생이 영어 본문을 안 외워오면 의자 위에 올라가게 해서 회초리로 사정없이 때렸어. 수업 시간 30분은 가르치고 30분은 때렸어. 그런데 내가 어느날 뭔 일을 하다가 본문을 안 외워간 거야. 그래서 난 떨면서 학교에 갔지. 그런데 모내기를 하라고 하는 거야. 난 신나서 논에 갔지. 근데 하루종일 모내기를 하면 좋았으련만, 1교시부터 모내기를 하고 4교시엔 다시 수업을 한다는거야. 영어가 4교시인데. 그래서 난 또 죽었다 싶었지. 그런데 4교시에 영어 선생이 안 들어오고 담임선생님이 들어오는 거야. 전쟁이 났다고. 집에 가라고. 그 순간 애들이 와! 했어. 집에 가라니까. 특히 나같이 영어 본문을 안 외워온 애들은 환호성을 질렀지. 그런데 그 뒤로 정말 고생을 죽어라고 했어..... 피난 갔다가 전쟁이 끝나서 돌아와보니까 집이 무너져서 흙으로 집을 만들었어. 그러고 또 고생을 엄청 했지. 근데 그게 가끔 생각나더라. 그 죽을 고생에 들어가는 순간 내가 환호성을 질렀다는 게....."
"내가 10살에 해방이 되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한약사 자격증을 땄다. 그 당시에는 한자를 읽을 수 있는지 시험을 봤어. 그렇게 한약방을 차렸어. (후에 증조부의 한약방은 대전에서 가장 커지고, 증조부의 제자들이 한의학과를 만들고 교수가 된다. 증조부의 처방전, 한약재, 소품 등은 대전시립박물관에 기증했다) 그래서 남들보단 좀 나았지만 그래도 너무 생활이 어려웠어. 그 땐 다 그랬지. 그러다가 어느날 학교에서 반바지를 배급해주는 거야. 한 반에 두 명만 추첨으로 줬어. 그런데 내가 된 거야. 아버지 어머니가 너는 운이 좋은 놈이다 했어. 나도 너무 기뻤어. 그 당시엔 그런 반바지가 없었어. 그런데 외사촌이 사촌누나 결혼식에 간다고 그 바지를 빌려달라는 거야. 그래서 내가 싫다고 했어. 내가 그걸 왜 빌려줘. 나도 아껴서 가끔 입는 옷인데. 내가 고집 부려서 결국 안 빌려줬어. 근데 그게 아직도 가끔 생각나. 아 그거 좀 빌려줄걸. 고작 그걸.....(나는 그 연세에도 그런 걸 후회하고, 또 지나간 인연들을 기억 하는 것에 대해 감상에 젖었는데...) 걔도 아직도 그 얘기해. (네???) 저기 살어. 자주 만나. 걔도 가끔 얘기해. 형 왜 그 때 안 빌려줬냐고 그것 좀 빌려주지 그랬냐고, 그래서 나도 미안하다, 그 때 좀 빌려줄걸 해(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