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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애 Jan 08. 2018

모두가 아픈 시절이었다.

그날의 기억들...



모두가 아픈 시절이었다! 
 
1987년 04월에 입대했다. 
지리산 언저리 시골 구석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2개월만에 입대했으니
세상 돌아가는 물정은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이었다.
힘든 훈련소 생활을 마치고 자대 배치를 받은게 서울 전경이었다.
그때 얼마나 상황이 다급했으면 우리 후임병들은 자대 배치를 육군 부대에 받았다가
며칠만에 전경으로 변경되어 오기도했다. 
 
1989년 10월 제대 했으니 그야 말로 전쟁터 같았던 시위현장을 그대로 겪어야했던 군생활이었다.
 
고대 정문에서 오전엔 출정식을 마치고 시내로 진출하려는 학생들을 막아야했고,
오후엔 출정식을 마치고 시내로 쏟아져 나온 시위대와 맞서야했다. 
 
이제 막 자대 배치 받은 신병에겐 정말 정신없는 뺑뺑이였다. 
왜? 저 들은 최루가스 마셔가며 처절하게 구호를 외쳐 대는지 생각해 볼 여유가 없었다. 그냥 기계적으로 짱돌이 날아 오면 방패로 막아야했고 화염병이 날아와도 방패로 쳐 내야했다. 화염병은 방패로 잘못 막으면 깨지면서 불길을 뒤집어 쓴다. 신병들은 요령이 부족하니 화염병을 쳐내지 못하고 깨뜨리거나 짱돌을 제대로 막지 못해 뒤로넘어가 고참이 맞기도했다. 
 
그런 날 이면 밤에 잠은 다잤다. 제대로 막지못했다며 고참들에게 개 맞듯이 맞아야했던 군생활이었다. 
 
1987년 06월의 서울 거리는 정말 대단했다. 오전에 각 대학에서 출정식을 마친 학생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넥타이 부대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면서 부터는 광화문에서 동대문에 이르는 서울 중심거리는 온통 시위대와 전경들이 뒤엉켜 그야 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종로 3가에서 동대문 쪽으로 시위대를 밀어 올리면 우리 뒤에 곧바로 다른 시위대의 무리가 따르고 그 뒤를 다른 전경 부대가 밀고있었다.  
 
이건 전선도 없고 전방도 없고 후방도 없는 거대한 물결의 한 덩어리였다. 
 
6월의 정점 일때 시내에 나가면 전경을 대하는 시민들의 시선은 싸늘했다.
물 한모금 얻어 마시기 힘들었다. 그 이전엔 그래도 나이 많은 아주머니들이 자식같은 놈들 불쌍하다며 양동이에 물도 떠다 주고 건물의 화장실도 이용하고했는데
이한열열사의 죽음이후 민심은 극에 달했던거 같다. 
 
영화 포스터의 저 사진이 이한열 열사 장례식 때 사진인거 같다.
그날, 이순신장군 동상을 마주보고 서있었다. 영화의 말미에 100만이 모였다고했는데, 나의 기억엔 무전이 날아 오기를 10만이 광화문광장으로 온다고했다.
정말 그 끝이 보이지 않는 행렬이었다.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작은차, 큰차에서 불을 뿜었다.(일명 지랄탄을 쏘는 시커먼 차) 그리고 아수라장이 되었다. 모두가 뒤섞여 뒤죽박이었다. 어떻게 상황이 종료되었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폭풍같은 6월의 신병 생활을  마치고 시위도 조금씩 줄었지만 89년 제대 때까지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다.  
 
이한열 열사를 죽음에 이르게한 최류탄은 통조림 깡통처럼 생긴 SY44탄이다. 이태리제 엽총을 개조해서 사용했는데 어깨에 밀착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멍이 들정도로 추진력이 강했다. 45도 이상 공중으로 발사하는게 원칙이었지만 그 당시의 시위는 정말 격렬했다. 
진압하는 전경들도 부상을 많이 당했다. 특히 화염병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두꺼운 진압복을 입어도 화상을 입어서 의가사 제대를 하거나 얼굴에 평생 지울 수 없는 흉터가 생긴 전경도 많았다. 진압할 때 위급한 상황에서는 바닥에 쏘라는 명령이 날아온다. 아스팔트 바닥에 비껴 맞은 최류탄은 시위대의 정강이 부위로 많이 날아 갔다. 미쳐 피하지 못하면 맞고 주저 앉기도 하고 다리를 절며 교문안으로 들어 가기도했다.   
 
시간이 흐르고 사고 많았던 SY44탄을 쏘던 총은 개조가 되어 45도 이하로 내리면 자동으로 방아쇠를 당길 수 없게 되고, 깡통모양의  탄도 4개가 들어가서 지그재그로 공중을 가로지르는 식으로 바뀌었다.  
 
많은 희생을 치른 후 세상은 아주 느리게 조금씩 변한것이다. 
 
나도 2번의 부상을 입었다.
고대 앞에서 저녁까지 시위가 있었고 상황이 종료되어 헬멧을 벗고 경계 근무중이었는데 머리에 뭔가 둔탁한 느낌이 들고 멍했다. 그리고 의식을 몇초간 잃었는데 날아온 짱돌에 맞은 것이다. 다행이 가벼운 뇌진탕과함께 12바늘을 꿰매는 정도였다. 한번은 대학로에서 날아온 돌에 왼손 검지을 맞았는데 골절까지 가지 않고 피만 좀 흘렸다. 
 
1989년 05월에 부산의 "동의대 사건"이있었다. 경찰이 학내 진입하여 작전하다 화재가 발생해 경찰관 7명이 숨지고 학생과 경찰 수명이 중상을 입은 사건이다. 그때 사망한 경찰관이 군복무중이었던 의경이 포함되어있었던거 같다. 그 이후로 언론에서 전.의경 처후 개선과 군에 보낸 자식 잃은 부모들의 심정을 인터뷰하면서 전경에 대한 국민들의 의식도 조금씩 변하는 계기가 되기도했다. 
그리고 이 사건이후로 시위 현장에서 화염병은 점점 사라져 갔던거 같다. 
 
영화를 보는 내내 30년 전의 기억들이 오버랩되었다.
우리 모두가 아픈 시절이었다. 
 
#1987년 #영화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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