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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남추녀 Mar 16. 2023

미움이 깊어 차라리 사랑하게 되는




누군가를 지독하게 미워한다는 건 깊이 생각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그렇기에 사랑과 미움은 아슬아슬한 경계를 두고 등을 맞대고 있다. 사랑이 짙어 미움이 되는가 하면, 미움이 깊어 사랑이 되기도 한다. 신기하게도, 종종 그렇다.

몇 년 전의 일이다. 한밤중에 마포대교를 찾았다. 알량한 위로의 문장이 없던 시절, 마포대교는 어둡고 조용했다. 그때는 여름에서 가을로 접어들던 무렵이었다. 바람 끝이 찼고 강물은 맹렬한 고요 속에서 흐르고 있었다. 나는 난간에 붙어 서서 한동안 강물을 내려다봤다. 어둡고, 높고, 쓸쓸해서 강물에 내 얼굴이 비치지는 않았다. 나는 우울증을 증오하고 미워했다. 조금 더 확실하고 정확하게 말하자면, 우울증을 앓는 ‘나’를 미워했다. 한없이 나약하고 지나치게 예민한 내가 싫었다. 나는 나를 이해할 수 없었고, 나와 화해할 수도 없었으며, 나를 용서할 수도 없었다.


마포대교에, 그것도 한밤중에 몰래 찾아간 건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나는 그 다리에 서서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올리려 했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올리려 했다. 그 중에 나는 없었고, 그래서 슬펐다.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나를 미워했고, 오늘의 나는 내일의 나를 미워할 예정이었다. 끝도 없는 그 미움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때였다. 난간 밖으로 조금 튀어나온 내 구두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게 된 것은. 한 번도 의식하지 못했는데, 구두 한 쌍은 양쪽 모두 굽이 많이 닳아 있었다. 나는 문득 구두를 처음 샀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로부터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세월이 흘렀고 내 구두는 딱 그만큼 마모(磨耗)되어 있었다. 그 마모는 내가 열심히 살았다는 흔적이었다. 구두굽이 닳을 때까지 참 열심히도 살았구나, 하고 오늘의 내가 어제의 나를 향해 말해주었다. 그 말을 꺼낸 순간 비로소 나는 모든 순간의 ‘나’를 응원하고 싶은 마음을 품게 되었다.


내가 그토록 미워했던 사내는 우울증에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매일 걷고, 또 걸었다. 아침에 일어나 출근을 했고, 괜찮은 척 외근을 나가고, 회식에 참석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일상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나는 알았고, 그랬기에 더는 지독하게 그 사내를 미워할 수 없게 되었다. 여전히 나는 나와 불화 중이다. 때로는 밉고, 때로는 진저리나고, 때로는 불쌍하다. 그리고 가끔은 사랑한다.


마포대교에 갔던 그 다음 날, 나는 새 구두를 한 켤레 샀다. 새 구두의 굽이 닳을 때까지만 열심히 살아보자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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