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알았다가 이제 더는 연락이 닿지 않게 된 어떤 이는 참 능숙하게 우는 사람이었다. 작은 일에도 곧잘 눈물을 흘렸고 우는 표정이 사뭇 근사했으며 울음의 깊이나 정도도 딱 적당했다. 너무 길지 않게, 딱 묵은 감정이 해소될 만큼만 울고 나서는 말간 얼굴로 해사하게 웃었다. 나는 그이의 우는 솜씨가 늘 부러웠다. 질투가 날 정도였다. 울음도 하나의 언어라고 한다면 그는 실로 뛰어난 슬픔의 통역사였다.
울음을 잃어버린지 오래되었다. 눈물도 모조리 말라 내 마음 속 슬픔의 영역은 늘 가뭄에 시달린다. 오랜 건기, 그리고 날리는 흙먼지. 바람이 불면 부스스 일어나는 감정의 티끌들 탓에 내 마음은 항시 뿌옇다.
잘 울어야 잘 웃을 수도 있다고, 몇 해 전 그이가 말했다. 나는 우는 법을 잊었다고 솔직히 털어놓았다. 그러니까 힘든 거야. 그이는 내 처지가 불쌍하다는 듯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멀뚱히 서 있었다. 그런 나를 향해 그이는 한 마디를 하고 돌아섰다.
눈물이 말랐다는 건 울 힘마저 없다는 뜻이지.
힘이 있어야 울 수도 있다고, 밥이나 먹으러 가자고 그이는 내 손을 잡아끌었다. 그날, 더운밥을 먹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기운이 없구나 싶었다. 울 기운이 없어서 슬픔을 감추고 살았구나, 하고 깨달았다. 우울증은 슬픔에 예민해지는 병이 아니라 슬픔에 둔감해지는 병이다. 발뒤꿈치처럼 변한 내 마음에 굳은살이 잔뜩 박였다는 걸 알고 나는 제법 슬펐고, 그리하여 울어볼까 했지만 역시 힘들었다. 힘들어서, 나는 끝내 울지 못했다.
언젠가 한 번 펑펑 울 날이 올까?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통곡한 뒤 꾸역꾸역 숟가락을 들고 갓 지은 밥을 퍼먹는 날이 올까? 발뒤꿈치는 인간의 몸에서 가장 무딘 부위란다. 그곳이 무딘 이유는 중력을 견디며 걷기 위해서란다. 발뒤꿈치도 힘든데 실은 힘들지 않은 척 한다는 것이리라.
마음껏 울게 된다면, 몇 해 전 연락이 끊긴 그이에게 고맙다고 인사라도 해야겠다.
고맙습니다.
당신 덕분에 힘껏 울었습니다,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