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림이 그리고 싶어 'DIY 명화 그리기'를 샀다.
'DIY 명화 그리기'는 밑그림이 그려져 있는 캔버스에 번호가 매겨져 있는데, 그 번호에 맞는 물감을 색칠하면 되는 것이다. 번호에 맞게 색칠만 하면 하나의 근사한 명화가 그려진다.
어릴 때는 연습장 한 권을 그림으로 채울 만큼 그림에 취미가 있었다. 커서는 그림 그리는 취미는 희미해졌지만, 그래도 마음 한편엔 그림을 그림을 그릴 때 기분 좋은 그 느낌을 항상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명화 그리기를 알게 됐고, 이걸 꼭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른 것 알아보지 않고 일단 구매했다.
그리고 명화그리기 세트가 도착했는데 처음 열어본 순간 굉장히 촘촘한 밑그림에 새끼손톱 10분의 1 정도 되는 크기에도 물감 번호가 매겨져 있는 걸 보고 벙 찌면서 많이 당황했다.
보자마자 '내가 이걸 할 수 있을까?' 란 생각이 먼저 들었다. 막막했다. 호기롭게 샀는데, 시작도 해보기 전에 '이거 진짜 힘들겠는데? 못할 것 같은데?'란 생각이 먼저 들었다.
하지만 곧 다시 생각을 바꿨다. '못하겠다는 생각이 더 커지기 전에 그냥 일단 붓을 잡아보자, 일단 뭐 하나라도 색칠해보자' 하는 생각으로. 그리고 실행에 옮겼다. '일단 시작' 한다는 생각으로.
안 되겠다는 생각에만 집중하면 난 시작도 해보기 전에 스스로 '못하는 사람'이라고 낙인찍고, 거기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일을 앞두고 있을 때 '힘들겠다, 안 되겠다'는 생각이 먼저 올라오면 그 생각에 잠식당하기 전에 일단 시작을 해버린다. 어설프게라도 시작을 하면 조금씩 진행이 되고, 어느 순간에는 좀 더 발전한 나를 발견하게 된다.
무엇이든 해보기 전엔 모른다. 내가 어느 정도 수준인지, 어디까지 할 수 있는 사람인지 해봐야 안다. 그렇게 하면서 실력이 늘기도 하고, 분명한 건 하기 전보다는 발전한다는 것이다.
이런 마음으로 그림 그리기를 시작했고, 막상 시작하니 생각보다 훨씬 재밌었다.
그림을 그리다보니 내가 이 꼼꼼한 작업을 할 수 있을까 하고 스스로를 의심했던 생각에서 벗어나고, 그림 그리기에 집중하게 되었다. 매일 하진 못해도, 3일에 한 번이나 어떤 날은 일주일에 한 번씩 하면서 너무 조급하지 않게 천천히, 느긋하게 이어나갔다.
'빠르진 않아도 이 속도로 멈추지만 말고 꾸준히 해보자' 하고 하다 보니 하얀 캔버스에 색깔이 더해져 점점 내가 그리는 해바라기의 모양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릴 때마다 달라지는 그림을 보며 뿌듯함과 성취감을 느꼈고, 그리는 과정을 기록으로 남겼다. 기록으로 남기다 보니 '내가 이만큼 했구나' 하는 과정을 한 눈에 볼 수 있어 좋았다. 그리고 그림을 그린 날에는 작은 성취감을 마음에 안고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그림을 그리는 순간에는 잡생각 없이 그림에만 집중하게 되었다. 무언가에 몰입할 때 오는 확실한 행복이 있다. 한 가지에 몰두하다 보니, 마음도 단순해졌다. 그림을 그리는 순간에는 마음이 단순하고 편안했다.
그리고 내가 그림을 그리면서 내가 자주 했던 생각이 있다.
‘완벽하지 않아도 돼.’
DIY 명화 그리기는 정해진 번호에 맞춰, 물감을 색칠해야 원래 샘플과 같은 완성본의 그림이 나온다.
그런데 그리다 보면 늘 정확하고 완벽하게 그 번호에 맞는 색깔을 맞추지 못하기도 한다. '번호에 맞춰서 이대로 해야 돼' 라는 걸 너무 강박처럼 가지면 그림 그리는 게 힐링이 아니라, 스트레스가 될 것이다.
나는 그림을 그리면서 정해진 번호에 주로 맞춰서 하긴 했지만, 내 마음대로 하기도 했다. 이 색깔을 꼭 칠 해야 돼라는 압박감을 가지지 않으니, 오히려 더 편안한 마음으로 즐기면서 하게 됐다. 그림을 그리면서 ‘완벽하지 않아도 돼. 이건 그림 대회에 출품작을 내는 것도 아니야. 그냥 편하게 해’ 이 말을 나 스스로에게 계속 해주었다. 잘하려고 하는 생각을 내려놓으니 마음이 정말 편안했다.
'완벽하지 않아도 돼'라는 말은 그림뿐만이 아니라 내 인생에도 적용할 수 있는 말이었다.
내가 무엇을 하든 완벽할 필요도 없고, 완벽의 기준도 없다. 내 삶에 주로 큰 부분을 차지하는 육아, 회사, 집안일, 글쓰기 등을 봐도, 이 모든 게 완벽할 필요는 없고 완벽의 기준 또한 없다. 그냥 내가 무언가를 하는 그 순간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그거면 충분하다.
그림을 그리면서 이런 인생의 깨달음을 얻었다. 그림을 그릴수록 이 마음은 더 자라났고, 단단해졌다. 난 그저 그림을 그린 것뿐인데 '완벽하지 않아도 돼'라는 마음이 내 인생 전반의 모든 부분을 편안하고 만족스럽게 만들어 주었다. 그 마음 하나가 내가 소소하고 자잘하게 집착하고 있던 것을 내려놓게 해 주었다.
9월 중순에 시작한 그림을 11월 중순에 마치게 되었다. 틈틈이 느긋하게 하다 보니 2개월 정도가 걸렸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 의무감이나 압박감 없이 그냥 이 과정 자체를 즐겼다. 내 마음이 하고 싶을 때, 하고 싶은 만큼 그날그날 그렸다. 그렇게 하다 보니 어느새 화사한 해바라기 그림이 완성되었다.
완성된 그림을 보니, 처음에 스케치만 되어 있는 캔버스를 받았던 때가 생각났다. 그땐 이 그림을 완성할 자신이 없었는데, 일단 시작 하고 멈추지 않고 꾸준히 하다 보니 그림이 완성됐다. DIY명화 그리기는 나에게 아주 소중한 경험이 되었다.
근사한 해바라기 그림을 완성한 것도 정말 좋지만, 이보다 더 좋은 건 내가 그림을 그리면서 얻은 마음이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림이 완성되는 2개월 동안 내 마음도 조금 더 자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