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와 크리에이터 소사이어티의 미래
어제 제주 세화리 독립서점 풀씨에서 민음사의 ‘조지 오웰: 더 에센셜’을 발견했다. 기술사회의 미래에 관한 책을 준비하던 중이었기에 오래전 영어로 읽었던 '1984'를 다시 읽고 싶어졌다.
다시 읽으니 '1984'는 독재자가 우리를 감시하고 억압하는 수준의 전체주의가 아니다. 가장 잔인한 형태의 전체주의로서, 단순히 반체제 인사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철저히 교화시킨 후에 처형한다. 순교자의 탄생을 막고 체제에 대한 어떤 의심도 허용하지 않기 위해서다. 주인공 윈스턴은 결국 빅브라더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 후에야 사형당한다. 이는 인간의 영혼마저 완벽하게 지배하려는 전체주의의 극단적 형태를 보여준다.
'1984'와 같은 디스토피아를 저지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접근이 필요하다. 첫째는 인간 중심 기술의 발전이다. 현재 우리가 직면한 감시자본주의의 위험에 맞서, 탈중앙화된 네트워크 기술, 프라이버시 보호 기술, 그리고 개방형 소스 기술이 대안이 될 수 있다. 블록체인 같은 분산형 기술은 중앙 통제를 어렵게 만들고, 암호화 기술은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하며, 오픈소스 운동은 기술의 투명성을 보장한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대안은 실행 가능한 유토피아적 비전의 제시다. 자유주의적 유토피아가 가능하다는 믿음이 있어야만 집단주의적 디스토피아의 실험을 저지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오웰의 에세이 '사회주의자는 행복할 수 있는가?'는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이 에세이에서 오웰은 당대 사회주의 유토피아 소설의 한계를 지적한다. 그가 보기에 H.G. 웰스나 윌리엄 모리스가 그린 완벽한 사회는 실제로 살고 싶은 곳이 아니다. 오히려 찰스 디킨스가 묘사한 빈민가의 활기 넘치는 삶이 더 매력적이다. 진정한 유토피아는 효율성이나 완벽한 평등이 아닌, '인간다운 삶'이 가능한 사회여야 한다는 것이다.
아쉬운 점은 오웰이 모리스의 비전을 가볍게 해석한다는 것이다. 그는 모리스의 '유토피아에서 온 소식'을 단순한 전원적 낙원으로 해석하지만, 모리스 유토피아의 본질은 창작을 통한 자아실현을 실현하는 사회다. 모리스는 모든 노동이 예술이 되고, 모든 노동자가 창작자가 되는 사회를 꿈꾼다. 기계가 단순 노동을 대체하고, 인간은 창의적이고 예술적인 노동에 집중하는 사회를 그렸다. 단순히 목가적 이상향이 아닌, 기술 발전이 인간의 창조적 잠재력을 해방시키는 구체적 비전이다.
모리스가 전망한 대로, 현대 경제는 크리에이터 이코노미라는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다. 디지털 기술의 발전으로 창작과 생산의 도구가 민주화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자신만의 콘텐츠를 만들고 공유하며 가치를 창출하고 있다. 모리스가 꿈꾼 '창작하는 인간'의 이상이 현실화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준다.
크리에이터 경제의 부상은 기술이 반드시 디스토피아적 통제로 이어지지 않으며, 오히려 인간의 창조적 자유를 확장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현재 관점에서 오웰의 '1984'와 에세이들이 주는 통찰은 종합적이다. 첫째, 전체주의는 기술을 통한 감시와 통제를 넘어 인간의 영혼마저 지배하려 한다는 점을 경고한다. 둘째, 이를 저지하기 위해서는 인간 중심의 기술 발전과 함께 실현 가능한 자유주의적 유토피아가 필요하다.
셋째, 진정한 유토피아는 완벽한 질서가 아닌 인간다운 삶이 가능한 사회여야 한다. 마지막으로, 모리스가 전망하고 현대 크리에이터 경제가 보여주듯, 기술은 인간의 창조적 자유를 확장하는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다.
결국 우리의 과제는 자유주의에 대한 신념으로 전체주의 디스토피아를 경계하면서도, 기술이 가진 해방적 잠재력을 활용해 자유주의 유토피아를 실현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