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가 강한 도시, 베를린

by 골목길 경제학자

동네가 강한 도시, 베를린


도시의 창의성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이 글은 도시 창의성을 결정짓는 핵심 요소로 건축환경에 주목한다. 건축환경은 일반적으로 건물 밀도, 용도 혼합도, 보행환경 등으로 정의되지만, 도시 전체의 창의적 잠재력을 좌우하는 보다 근본적인 요소는 분권 구조다. 분권 구조는 행정 분권과 기능 분권으로 나뉘며, 이 가운데 창의성에 더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형식적 행정 구역보다 실질적인 자치와 문화 활동이 이루어지는 기능 분권 구조다.


도시의 기능적 분권 구조는 중심지의 수와 역할에 따라 단일중심형, 이중중심형, 다중심형으로 나뉜다. 단일중심형은 하나의 도심에 주요 기능이 집중된 구조이며, 이중중심형은 두 개의 중심지가 각기 다른 기능을 수행한다. 다중심형은 여러 중심지가 고유한 정체성과 기능을 지니고 상호 연결된 구조로, 다양성과 창의성을 촉진하는 도시 환경을 가능하게 한다.


베를린은 이러한 다중심형(polycentric) 도시 구조의 대표적 사례다. 베를린의 도시 문화를 다룬 많은 연구와 저술은, 각 자치구와 동네가 고유한 문화를 형성하고 있으며, 주민들 또한 자신의 생활권을 중심으로 일상을 꾸려간다고 지적한다.


현대 도시 트렌드와 다중심형 도시의 융합

이와 같은 도시 구조는 최근 부상한 도시계획 트렌드와도 맞물린다. 15분 도시, 보행중심도시, 직주근접, 다운타운 라이프스타일은 모두 다중심형(polycentric) 도시 구조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트렌드는 단일 대규모 중심지에 모든 기능이 집중된 구조가 아니라, 여러 개의 작은 중심지가 각자의 특성과 정체성을 가지고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구조를 지향한다.


15분 도시 개념과 다중심형 도시는 일상생활에 필요한 모든 시설과 서비스가 걸어서 접근 가능한 거리에 위치하는 점에서 동일한 철학을 공유한다. 보행중심 환경은 다중심 도시의 핵심 특성으로, 자동차 의존도를 낮추고 근린 중심의 활발한 커뮤니티 형성을 촉진한다. 직주근접성은 복합용도 건축물을 통해 구현되며, 이는 생활과 일, 여가가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환경을 조성한다. 다운타운 라이프스타일은 창의적 활동의 중심지들을 여러 지역에 분산시킴으로써 도시 전체에 활력을 불어넣고, 각 지역이 고유한 특색을 발전시킬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다.


다중심형 도시는 또한 도시의 지속가능성과 회복탄력성을 높이는 데 기여한다. 여러 중심지에 기능이 분산됨으로써 에너지 소비와 교통 혼잡이 줄어들고, 재난이나 경제적 위기 상황에서도 다른 중심지들이 기능을 유지할 수 있다. 이러한 구조는 도시계획의 궁극적 목표인 형평성과 삶의 질 향상까지도 실현 가능하게 한다.



베를린의 행정 구역, 자치구와 오르트슈타일


베를린의 자치구(Bezirk) 구조와 다중심성

베를린은 역사적, 정치적 이유로 발달한 대표적인 다중심형 도시다. 분단 시기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이 각각 자체 중심지를 발전시켰고, 통일 이후에도 이러한 다중심 구조가 유지되었다. 2001년 행정개편으로 현재의 12개 자치구(Bezirk)는 단순한 행정구역이 아니라 각각 독자적인 중심지, 문화적 정체성, 경제적 특성을 가진 '작은 도시들'로 기능한다.


이 자치구들은 다시 총 97개의 오르트슈타일(Ortsteile)로 세분화된다. 오르트슈타일 문화적·지리적 정체성을 반영하지만, 법적·정치적 자치 권한은 없다.


베를린의 일부 지역, 특히 구 도심과 내부 지역에서는 '키츠(Kiez)'라 불리는 독특한 동네 문화가 발달했다. 키츠(Kiez)는 공식 행정 단위가 아니라, 주민들에 의해 자율적으로 인식되고 형성된 생활문화 단위로, 크기와 경계는 고정되지 않고 지역 정체성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주로 프렌츠라우어 베르크, 크로이츠베르크, 노이쾰른과 같은 중심부 지역에 약 20개 정도 존재하며, 각 키츠는 고유한 분위기와 커뮤니티를 형성한다. 이러한 키츠 문화는 지역 정체성과 소속감을 강화하며, 베를린의 다층적이고 역동적인 도시 특성을 보여준다.


베를린의 자치구별 특성을 살펴보면 다양한 특성이 나타난다. 미테(Mitte)는 역사적 중심지로 정부 기관, 문화시설, 관광지가 집중되어 있다. 프리드리히스하인-크로이츠베르크는 창의산업, 스타트업, 대안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한다. 샤를로텐부르크-빌머스도르프는 고급 상업지구와 학술 기관이 밀집해 있으며, 노이쾰른은 다문화 지역으로 예술가들과 이민자 커뮤니티가 활발하게 활동한다. 판코는 녹지와 주거지가 조화를 이룬 생태적 지역의 특성을 보인다.


이러한 다중심 구조는 도시의 창의성과 회복탄력성(resilience)에 여러 장점을 제공한다. 여러 중심지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어 문화적, 경제적 다양성이 증가하고, 하나의 중심지에 문제가 생겨도 도시 전체가 위기에 빠지지 않는 위험 분산 효과가 있다. 각 중심지가 고유한 특성과 강점을 발전시킬 수 있는 지역 특성화가 가능하며, 출퇴근 교통이 여러 방향으로 분산되어 교통혼잡이 줄어드는 장점이 있다. 또한 다양한 기능이 여러 중심지에 분산되어 시민들의 접근성이 향상되는 효과도 있다.



베를린 서남부 달렘의 동네 문화



동네 문화가 중심이 되는 도시

베를린의 다층적인 자치구 구조 위에서 발전한 독특한 동네 문화는 도시의 창의성을 촉진하는 중요한 요소다. 분권화된 도시 구조는 각 지역만의 고유한 정체성과 문화적 실험을 가능하게 하며, 이를 통해 베를린 특유의 창의적 도시 환경이 형성되었다. 도시 재생, 복합용도 공간, 소상공인 중심의 상권 등 베를린의 특징적 요소들은 모두 이러한 독특한 동네 문화를 기반으로 발전해 왔다. 베를린의 많은 지역에서는 주민들이 자신의 동네에 대한 강한 소속감과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지역 공동체를 중심으로 한 다양한 문화적, 사회적 활동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문화는 단지 정체성의 표현에 머물지 않는다. 동네 중심의 도시 재생 모델은 현대 도시 트렌드가 지향하는 창의성, 지속가능성, 공동체 가치를 통합적으로 구현한 사례로, 이는 단순한 물리적 재생을 넘어 문화적, 사회적 재생을 포함하는 종합적 접근법이다. 베를린의 도시 재생 방식은 '절제의 미학'을 체현한다. 과도한 재개발이나 과시적 건축이 아닌, 기존 구조물의 본질적 가치를 인정하고 최소한의 개입으로 새로운 기능을 부여하는 방식이다.


구체적으로, 베를린은 산업유산과 버려진 공간을 창의적으로 재활용하는 도시 재생의 모범 사례를 보여준다. RAW 겔렌데(RAW Gelände)와 홀츠마르크트(Holzmarkt)는 옛 철도 시설과 공업 지대를 크리에이터와 소상공인의 활동 공간으로 재탄생시킨 대표적 사례다. 이러한 공간들은 대규모 재개발이 아닌, 기존 구조물의 점진적 변형과 재활용을 통해 지역의 역사성을 보존하면서도 새로운 경제적, 문화적 가치를 창출한다.


베를린의 동네 문화는 직(직장), 주(주거), 락(여가)의 근접성을 촉진한다. 주거지역과 상업 공간, 문화시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어 자치구 내에서 대부분의 일상 활동이 가능하다. 이러한 복합용도 공간 구성은 자동차 의존도를 낮추고, 걷기 좋은 도시 환경을 조성하는 동시에 다양한 사회적 교류와 창의적 활동을 촉진한다.

베를린의 건축물들은 종종 1층에 상업 공간, 2-3층에 사무실이나 작업실, 그 위층에 주거 공간이 함께 있는 복합용도 구조를 가진다.


현대 도시계획에서 강조하는 직주근접성과 다운타운 라이프스타일은 베를린의 복합용도 공간 구성을 통해 실현되고 있으며, 이는 크리에이터 타운을 중심으로 한 키츠 지구의 핵심적 특성이다. 이러한 공간 구성은 장시간 통근에 따른 에너지 소비와 환경 부담을 줄이고, 지역 중심의 생활양식을 촉진함으로써 지속가능한 도시 발전에 기여한다.


베를린의 자치구 구조는 또한 소상공인과 크리에이터들에게 이상적인 활동 환경을 제공한다. 대규모 상업 지구가 아닌, 작은 동네 단위의 상권이 발달해 진입 장벽이 낮고 다양한 실험이 가능하다. 특히 1층 상가와 작업실, 위층 주거 공간이 결합된 건축 형태는 크리에이터들이 생활과 작업을 통합할 수 있는 기반이 된다.


베를린의 소상공인들은 단순한 상품 판매자가 아닌 문화 생산자로서의 정체성을 가진 경우가 많다. 카페 운영자, 서점 주인, 공방 운영자 등이 단순한 상업 활동을 넘어 전시, 워크숍, 커뮤니티 활동 등 다양한 문화적 실천을 병행한다. 이러한 소상공인들의 활동은 베를린의 창의적 문화 생태계를 지탱하는 중요한 기반이 된다.


크리에이터 타운이 중심이 된 키츠 지구에서 소상공인과 크리에이터는 단순한 경제 주체를 넘어 지역 문화의 생산자이자 커뮤니티 활성화의 주체로 기능한다. 이들의 활동은 다양성, 창의성, 실험성을 바탕으로 한 독특한 지역 정체성 형성에 기여하며, 이는 현대 도시 트렌드가 지향하는 문화적 다양성과 창의성의 가치를 구현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한국 도시에 주는 함의

베를린의 자치구와 키츠 기반 도시 구조는 대도시부터 중소도시까지 한국 도시 전반에 유효한 대안을 제시한다. 지방 소멸 위기를 넘어서, 초고밀도와 중앙집중화로 인한 대도시의 문제까지 포괄하는 새로운 도시 패러다임이다.


서울, 부산 등 대도시의 경우, 자치구를 보다 자율적인 생활권 단위로 재구성하고 지역 고유의 정체성을 강화하는 접근이 요구된다. 강남, 홍대, 성수, 해운대, 서면 등 이미 정체성이 뚜렷한 지역들을 크리에이터 타운으로 육성하고, 이들을 연결하는 다중심 도시 구조를 정착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러한 방향은 공간 재편을 통해 정체성과 창의성을 회복하는 도시 전략이다.


중소도시는 행정동 단위에서 건축적 특성과 기능을 분화하여 2~3개의 중심지를 육성하는 미시적 다중심 모델이 효과적이다. 각 지역의 역사적 자산과 문화적 자원을 활용해 획일적 개발에서 벗어나 고유한 매력을 발굴하는 방식이다.


베를린의 다중심형 도시 구조는 교통혼잡, 주택문제, 지역 불균형, 커뮤니티 붕괴 등 한국 도시들이 마주한 여러 과제에 통합적 해결책을 제시한다. 크리에이터 타운을 중심으로 한 재생 전략은 대규모 개발이나 외부 자본 유치가 아닌, 지역 내 창의성과 잠재력을 기반으로 한 지속가능한 발전 경로를 열어준다.


이러한 다중심 도시 구조는 베를린에서처럼 현대 도시 트렌드—15분 도시, 보행중심도시, 직주근접, 다운타운 라이프스타일—와 유기적으로 맞물리며, 창의성과 지속가능성을 동시에 달성할 수 있는 모델로 주목받고 있다. 다양한 자치구가 고유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창작과 생활이 결합된 환경을 제공함으로써, 도시 전체가 하나의 창의 생태계로 작동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크리에이터 타운은 도시 활력과 혁신의 거점으로 기능한다.


이 모델이 한국 도시에 주는 핵심 교훈은 도시 구조와 문화 생태계의 긴밀한 연계다. 서울은 강남·강북의 이분법을 넘어서 각 자치구가 고유한 에너지와 창의성을 발현할 수 있는 구조로 재편될 필요가 있으며, 부산, 대구, 광주 등 광역시들도 중심지 편중을 탈피해 다중심 네트워크형 도시로 전환할 수 있다. 중소도시들 역시 지역별 특성화를 통해 도시 경쟁력을 제고할 수 있다.


결국, 크리에이터 타운을 중심으로 한 다중심형 도시 구조는 도시 기능의 재배치와 더불어 창의성과 지속가능성, 공동체 회복을 통합하는 도시 모델이다. 베를린의 경험은 한국 도시들에 새로운 통찰과 실천적 방향성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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