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교과서처럼 읽는 책이 에드워드 글레이저의 <도시의 승리>다. 도시가 승리했다, 어떻게 보면 너무나 당연한 주장을 하는 이 책에서 그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책은 도시를 인류 발전의 중심에 둔다. 5,000년 전 메소포타미아에서 문명이 시작된 이후 도시가 문화, 과학, 경제의 발전을 이끌었고, 과거나 현재나 동일하게 도시의 비밀은 인재의 집적과 이를 통한 혁신에 있다고 주장한다. 도시의 미래도 인재에 달렸다고 말한다. 인재를 유치하는 도시는 계속 성장할 것이며 그 반대로 인재를 모으지 못하는 도시는 쇠락할 것이다.
물리적 성공에 대한 의지가 강한 한국에서도 다수의 사람이 하드웨어가 아닌 휴먼웨어와 소프트웨어가 도시의 경쟁력을 결정하다는 글레이저의 주장에 동의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가 도시의 승리를 주장하지만, 그의 도시는 모든 도시가 아닌 ‘중심부(다운타운) 중심의 대도시’다. 그의 책에서 승리한 도시는 대도시지 다른 도시가 아니다.
대도시가 승리했다는 글레이저의 주장이 정당할까? 필자는 도시 기준, 중소도시 경쟁력, 도시 구조, 라이프스타일 감수성 등 적어도 네 가지 이유에서 그의 주장을 비판한다. 첫 번째가 도시의 기준이다. 글레이저는 책에서 도시가 무엇인지, 특히 어느 정도 규모의 인구가 도시 기준을 만족하는지를 논의하지 않는다. 인구 100만 명 이상의 대도시만이 성공할 수 있는 도시인 것처럼 서술할 뿐이다. 하지만 그가 성공 사례로 제시한 도시 중 많은 도시가 이 기준을 만족하지 못한다. 고대 아테네, 중세 파리, 제노아, 베니스, 근대 버밍햄, 암스테르담, 보스턴, 현대 뉴욕, 파리, 런던, 도쿄, 밴쿠버, 미니아폴리스, 싱가포르 등 다양한 규모의 도시다. 그에게 인구 10만의 고대 아테네와 인구 1,400만의 현대 도쿄는 같은 종류의 도시일까?
그는 도시의 성공에 중요한 것은 인구의 수가 아니고 인재를 유치할 수 있는 능력이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실제로 글레이저의 도시들은 공통적으로 한 대륙, 국가 또는 적어도 한 지역의 중심도시로 기능했다. 그렇다면 대도시가 아닌 중심도시의 승리를 주장하는 것이 맞다. 그래도 도시 규모의 문제는 남는다. 중심도시는 규모와 관계없이 만들어질 수 있을까? 아쉽게도 글레이저는 중심도시가 되기 위해 필요한 인구 규모를 논의하지 않는다. 대도시를 도시 성공의 필요조건으로 가정할 뿐이다.
필자는 대도시가 승리한다는 글레이저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중소도시의 경쟁력이다. 독일, 일본, 스위스 등 많은 나라에서 많은 중소도시가 대도시와의 경쟁에서 밀리지 않는다. 미국에서도 포틀랜드, 오스틴, 볼더와 같은 중견도시가 창조도시로 건재하다. 대도시도 처음부터 대도시로 시작한 것이 아니다. 뉴욕, 도쿄, 샌프란시스코, 시애틀, 미니애폴리스 등 그가 승리한 도시로 소개한 도시도 처음에는 소도시로 시작했다. 더욱이 대도시 경쟁력 논리는 코로나 시대에 설득력을 잃고 있다. 재택근무가 확대되면서 선진국 대도시의 많은 인력이 교외나 소도시로 이동하고 있다. 온라인 시스템이 의료, 학교, 쇼핑으로 확대되면, 대도시 이점은 더욱 약해질 것이다.
세 번째가 대도시의 보편적인 구조다. 글레이저가 이상적인 도시로 생각하는 뉴욕은 중심부에 기업과 상업시설이 집중된 ‘중심부 중심 도시’다. 그는 다른 도시도 중심부의 밀도를 높여 더 많은 사람과 기업을 중심부로 유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필자가 글레이저의 도시를 ‘중심부 중심의 대도시’라고 부르는 이유다.
글로벌 대도시 중 뉴욕과 같은 중심부 중심 구조를 가진 도시가 보편적인 모델일까? 도쿄, 파리, 런던 등 다른 글로벌 도시에서는 기업과 상업시설이 한 도심에 집중되어 있지 않고 다수의 작은 다운타운에 분산됐다. 더 면밀히 관찰하면, 이들 도시는 중심부와 주변부의 차이가 크지 않은, 작은 마을이 이어진 도시임을 알 수 있다. 중심부 중심 도시의 한계는 지속가능성이다. 중심부 밀도를 무한정 높이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모든 도시가 어느 시점에서는 불가피하게 도시 인구를 분산시켜야 한다. 특히, 인구 밀도와 이동이 안전을 위협하는 코로나 시대에는 중심부 중심 도시가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 없다.
마지막으로 글레이저의 라이프스타일 감수성이다. 다수의 경제학자와 마찬가지로 글레이저는 도시 경쟁력을 인구 밀도, 도시기반 시설, 저소득층 수용성 등 물질적인 요인에서 찾는다. 청년들이 대도시 중심부에 몰리는 이유도 중심부가 제공하는 라이프스타일보다는 경제적 기회에서 찾는다. 대안적 라이프스타일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 그의 책에는 삶의 질과 라이프스타일을 찾아 소도시로 이주하는 사람들의 스토리는 등장하지 않는다.
대도시가 승리했다는 글레이저의 주장이 과거에는 맞다고 해도 미래에도 적용될 수 있을지는 더 토론해야 한다. 필자가 동의하지 않은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글레이저와 달리 필자는 라이프스타일의 다양성이 도시를 더욱 다양하게 만들 것으로 믿는다. 물질적인 시각에서 도시를 보면 대도시의 승리는 불가피하지만 다양성 시각에서 보면 현재 도시는 이미 다양하고 앞으로 더욱 다양해질 것이다. 라이프스타일 시대의 도시 경쟁력은 규모가 아닌 라이프스타일 진정성이다.
둘째, 글레이저 도시의 지속가능성이다. 글레이저가 전망하는 대도시 중심의 경제가 지속 가능하려면 많은 사람들이 글레이저가 원한대로 합리성에 근거해 대도시로 이주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의 세계는 다르다. 아비지트 배너지와 에스테르 뒤플로가 ‘힘든 시대를 위한 좋은 경제학’에서 누누이 강조하지만, 현실 세계의 노동자들은 경제적인 기회를 찾아 대도시로 이주하지 않는다. 여러 가지 이유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고향 마을을 떠나지 못하는 것이다. 이동을 거부하는 지역의 노동자는 대도시의 승리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트럼프 대통령의 보호무역주의를 지지한 미국 중산층 노동자처럼 대도시 경쟁력을 위협하는 정책을 선호한다.
그렇다면 글레이저는 왜 ‘무리하게’ 중심부 중심의 대도시 구조를 주장하는 것일까? 그는 누구와 싸우는 것일까? <도시의 승리>에서 글레이저가 공격하는 ‘적’은 대도시 또는 대도시의 특정 지역에서 사는 기득권자들이다. 대도시 지역의 주택 공급을 반대하는 그들 때문에 대도시 주택의 가격이 중산층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 오른다고 믿는다.
여기서 질문하게 된다. 글레이저는 왜 우리가 특정 지역에서 거주해야만 기회를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일까? 도시의 역사는 경쟁의 역사다. 도시가 발전하려면 새로운 인재가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거나 기존 도시의 새로운 지역을 중심지로 개척해야 한다. 새로운 도시는 기존 중심지의 가격이 높아져야만 대안으로 부상할 수 있다. 정부가 도시 간의 경쟁을 확대하길 원한다면 기존 중심지보다는 새로운 지역에 주택을 공급해야 한다. 정부가 기존 중심지에 계속 투자하면 기존 중심지에 대한 시민의 선호를 더욱 부추기는 예상하지 못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글레이저와 달리 필자는 소도시와 동네의 승리를 전망한다. 팬데믹 이후 늘어난 일상의 장소는 온라인, 집, 그리고 동네다. 생활 반경이 좁혀지면서 자연스럽게 동네 중심 생활이 일상으로 자리 잡았다. 앞으로 온라인 기술이 더욱 발전하면 동네 중심 생활의 편리성도 개선될 것이다. 라이프스타일 다양성에 대한 욕구도 소도시에 유리하다. 우리 사회가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지면서 개성, 다양성, 삶의 질, 사회 윤리 등 탈물질주의에 대한 욕구가 더욱 확대될 것이며, 탈물질주의는 대도시보다는 소도시에 더 많은 기회를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