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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목길 경제학자 Sep 23. 2021

독립적인 로컬 생태계를 위해 필요한 조건들

로컬 크리에이터 산업이 하나의 ‘산업’으로 성장하려면 다른 산업과 마찬가지로 독자적으로 작동하는 생태계가 필요하다. 창업 생태계란 창업자, 소비자, 창업 훈련기관, 창업 지원기관, 투자자 등이 유기적으로 상호작용하면서 지속적으로 창업을 활성화하는 환경으로 정의할 수 있다. 로컬 경제에 직접 참여하지 않지만 생산자와 소비자를 지원하는 지방정부, 주민단체, 금융기관, 소상공인 단체 등도 생태계의 구성원이다.


로컬 자원을 활용해 로컬 시장에서 창업하는 로컬 크리에이터의 특성상 그들의 생태계는 일반 생태계와 다른 모습으로 형성된다. 교육과 훈련, 창업자 육성, 그리고 투자 유치 분야에서 로컬 크리에이터 생태계에 특화된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이 필요한 것이다.


로컬 크리에이터의 핵심 경쟁력은 공간 기획, 콘텐츠 개발, 커뮤니티 디자인 능력이다. 건축가와 디자이너 출신 로컬 크리에이터들의 부상이 보여주듯이, 사람과 돈이 모이는 공간을 창조하지 못하는 사업자는 골목상권에서 생존하기 어렵다.


공간 기획 능력이란 공간을 직접 설계하고 시공하는 능력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공간으로 지역과 동네의 문화적 랜드마크를 만들겠다는 의지, 자신의 철학과 비즈니스 모델을 공간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관심과 호기심, 자신의 취향을 보여주는 소품과 예술품을 수집하는 정성, 공간에 과감하게 투자할 수 있는 과감성 등이 로컬 창업가가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공간적 소양이다.


문화 경쟁력은 물리적 공간의 문제만은 아니다. 로컬 비즈니스의 경쟁력은 다른 지역이 제공할 수 없는 경험과 상품의 생산이다. 이를 위해 문화역사, 자연환경, 지리장소, 커뮤니티 등 로컬 자원을 비즈니스 모델의 핵심 요소로 활용해야 한다. 공간에 담긴 역사, 그리고 이와 연결된 자연, 제품, 스토리, 예술가 등이 중요한 로컬 콘텐츠 소재다.


정규 교육과정에서 지역교육에 소홀하고 로컬 미디어의 전반적인 부진을 고려할 때 창업 준비 단계에서 창업자가 스스로 로컬 콘텐츠 소재를 체계적으로 수집해야 할 수 있다. 자신이 활동하는 지역의 로컬 자원, 특히 지역산업, 크리에이터, 문화창조 기반 등 지역의 상업자원에 대한 정보는 소비자와 파트너가 참여하는 생태계 구축의 기본 자료가 될 수 있다. 어반플레이, 재주상회, RTBP 등 로컬 크리에이터 산업의 선두 주자들이 로컬 매거진 발행이나 지역자원 아카이빙으로 시작한 것에서 로컬 콘텐츠 개발 능력의 중요성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가게가 창업한 지역을 변화시키는 힘, 지역의 다른 가게와 협업하는 능력, 지역 장인 제품을 발굴해 편집하는 기술 등 커뮤니티 자원에 기반한 생태계 구축을 의미하는 커뮤니티 디자인 능력도 로컬 크리에이터의 성공 조건이자 필수 경쟁력이다.


로컬 비즈니스는 구조적으로 지역에서 생태계를 구축해야 하는 커뮤니티 비즈니스다. 커뮤니티 비즈니스라고 해서 협동조합, 마을기업, 사회적 기업 등 주민이 직접 경영에 참여하거나 커뮤니티 문제 해결에 사업의 목적을 두는 기업으로 한정할 필요는 없다. 소비자, 파트너, 이해당사자를 하나의 커뮤니티로 묶어 마니아, 팬덤, 프로슈머, 컬래버레이션, 팝업, 지역 축제와 행사 등을 밀레니얼 시대에 중요한 기업 자원으로 활용하는 기업도 실질적으로 커뮤니티 비즈니스로 분류할 수 있다.



로컬 크리에이터를 양성하는 장인대학을 구축하라

기존 창업 생태계에는 로컬 크리에이터의 핵심 경쟁력을 훈련할 수 있는 기관을 찾을 수 없다. 도제훈련과 창업교육으로 현 시스템을 보완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교육기관의 진입이 필요한다. 필자는《골목길 자본론 》에서 이와 같은 학교를 ‘장인대학 ’으로 부르고, 장인대학이 로컬 크리에이터 생태계의 구심점이 될 것으로 전망한다. 장인대학은 현재 일본과 미국에서 지역재생을 위해 보편적으로 활용되는 지역기반 창업 자원 프로그램과 맥을 같이 한다.


현재 민간에서 시도되는 장인대학 모델은 크게 장소 기반 창업 지원 프로그램, 장인×크리에이터, 커뮤니티 모델로 분류할 수 있다. 장소 기반 창업 지원 프로그램이란 공간, 디자인, 커뮤니티, 스토리 등 장소 기반 창업에 필요한 콘텐츠를 개발할 능력을 훈련하는 프로그램을 말한다.


장소 기반 창업 지원 프로그램으로는 제주창조경제혁신센터가 운영하는 ‘리노베이션 스쿨 인 제주’를 들 수 있다. 센터가 제주 원도심에 유휴공간을 확보해 이곳에 창업할 사업자를 공모해 지원하는 사업이다. 창업할 지역은 사전에 공지하지만, 스폿, 즉 공간은 현장에 와야만 알 수 있다. 그 공간, 그 공간이 위치한 지역에 어떤 비즈니스가 필요한 건지에 대해 논의한 다음, 구체적인 비즈니스 모델 제안은 해커톤 방식으로 진행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창업가가 창업할 장소를 먼저 알고 무얼 할지를 고민한다는 사실이다.


로컬 콘텐츠는 기본적으로 자기가 창업할 장소를 알아야 개발할 수 있다. 리테일 시장의 변화를 볼 때 앞으로도 공간 기반, 장소 기반 창업은 더욱 중요해질 것이다. 정부가 청년창업지원 정책을 사업 모델 기반에서 장소 기반 창업 지원으로 돌려야 하는 이유다.



군산의 로컬라이즈 프로그램도 장소 기반 모델이다. 군산 원도심에 창업하는 조건으로 청년 창업가를 훈련하고 지원한다. 창업 지역을 지정해서 거기에 맞는 비즈니스 모델을 찾도록 교육하는 장인대학 정신에 충실한다. 참가자들은 관광 앱, 로컬 브랜드 등 군산 원도심 자원과 연결된 사업을 준비한다.


두 번째 장인대학 모델이 장인과 크리에이터의 협업 모델이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2019년 추진한 ‘골목상권×콘텐츠산업’ 사업이 흥미로운 장인대학 모델이다. 예술가와 디자이너를 골목상권에 투입해 매장의 공간과 콘텐츠 경쟁력을 높이는 사업이다. 공간 기획, 콘텐츠 개발은 기존 상인이 배우기 어려운 기술이기 때문에 콘텐츠 개발자를 매치해주는 아이디어가 참신하다.


제주창조경제혁신센터의 ‘로컬 브랜딩 스쿨’, 광주 동구청의 ‘충장장인학교’도 ‘장인×크리에이터’ 모델이다. 로컬 브랜딩 스쿨은 제주에서 활동하는 공예 장인을 기획, 디자인, 콘텐츠 분야의 크리에이터와 연결, 이 두 그룹이 공예 장인의 공예품을 리브랜딩해 새로운 로컬 브랜드로 개발한다. 2019년 원년 프로그램에는 4명의 제주 장인과 전국에서 선발한 12명의 크리에이터가 참여했다. 충장장인학교는 500명의 소상공인 장인이 활동하는 광주 중심상권의 자원을 로컬 크리에이터와 연결하는 사업이다. 2020년 첫 사업에 참여한 장인은 충장로의 한복, 양복, 구두, 은공예 장인이다.


장인대학이 굳이 정규 학교일 필요는 없다. 이미 전국 전역에서 로컬 크리에이터를 지원하는 앵커시설, 코워킹 스페이스, 중간지원조직이 장인대학 기능을 한다.   일회성 행사로 그치지 않고 탄탄한 네트워크로 로컬 크리에이터 커뮤니티를 지원하는 평창의 감자꽃스튜디오, 강릉의 파도살롱이 지역에 좋은 모델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장인대학이 새로운 개념은 아니다. 농촌운동이 시작된 20세기 초부터 한국의 지역 활동가들은 학교를 중심으로 농업 인재를 육성하고 농업을 진흥했다. 학교 중심의 산업 생태계를 운영하는 대표적인 지역이 홍성의 홍동마을이다. 홍동마을 공동체의 이상은 학교이면서 동시에 자급자족하는 마을이다. 공부와 노동의 완전한 일치를 지향한다.


농업학교 중심으로 시작된 홍동마을은 이제 한국을 대표하는 유기농과 협동조합 생태계로 성장했다. 풀무학교 졸업생들이 마을에 남아 창의적인 농법을 개발하고 협동조합 기업을 설립한다. 전국적인 평판을 가진 요구르트 브랜드 평촌요구르트, 베이커리 자연의 선물, 출판사 그물코가 홍동마을이 배출한 로컬 브랜드다. 풀무원, 한살림 같은 전국 규모의 유기농 기업의 기원도 풀무학교에서 찾을 수 있다. 현재 전국적으로 늘어나는 장인대학이 풀무학교 수준으로 발전하면, 지역의 장인대학에서 훈련 받은 창업자가 그 지역에서 창업하고 생태계를 구축하는 지역발전 모델이 보편화될 것이다.


로컬 브랜드 창업자를 육성하는 장인대학 프로그램은 앞으로 계속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로컬 문화와 이를 창조하고 사업화하는 로컬 브랜드에 대한 수요가 그만큼 큰 것이다. 전국 228개 기초 단체가 지역 특색에 적합한 골목산업을 선정하고 이 분야에서 창업할 인재를 육성할 장인대학을 설립하고 운영한다면, 장인대학 졸업생을 중심으로 새로운 소상공인 창업 생태계를 구축할 수 있을 것이다.



골목산업에도 기획사가 필요하다

문화산업의 가장 큰 특징은 기획사의 중심적 역할이다. 대중음악, 영화, 드라마 등 대중문화산업에서는 연예기획사, 미술 분야에서는 갤러리, 저술 시장에서는 출판사가 예술가를 시장으로 데뷔시키고 스타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기획되지 않은 스타는 없다고 할 정도로 스타 양성 과정에서 기획사의 역할은 절대적이다.


골목산업도 문화산업적 성격이 강한 분야다. 창의력과 독창적 예술성이 골목 장인으로서의 성공을 좌우한다. 예술가, 셰프, 디자이너, 혁신적인 창업가 등 골목문화를 주도하는 이들은 모두 문화산업 종사자이기도 하다. 도시사회학과 대중문화학에서도 골목 장인이 창출하는 거리문화를 씬으로 부르며 문화산업의 일종으로 분류해 연구한다.


골목산업이 문화산업이라면 로컬 크리에이터를 발탁하고 스타로 키우는 기획사 역할은 누가 하고 있을까 ? 만약 기획사 비즈니스가 활발하지 않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 정부가 골목산업을 육성하려면 여타 문화산업 업종에 존재하는 기획사 모델을 장려해야 할까 ? 골목상권에 대한 연구가 아직 초기 단계이고 축적된 자료가 부족하기 때문에 이 의문에 대한 명쾌한 답을 찾기 어렵다. 하지만 문화경제학은 단순히 정부 지원에 의한 체계적인 문화산업 육성은 어렵다는 교훈을 던진다. 지속가능한 골목 장인육성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로컬 크리에이터를 양성해 수익과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기업, 로컬 크리에이터 기획사의 역할이 필요하다.


연희동의 어반플레이, 강릉의 더웨이브컴퍼니, 방배동의 비로컬 등 기존 로컬 크리에이터 기업들이 자신의 코워킹 스페이스를 활용해 창업가를 훈련하거나 초기 창업 기업을 보육하고 투자사와 연결하는 등 다양한 방식의 로컬 크리에이터 매니지먼트 비즈니스를 실험하고 있다. 가장 구체화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강릉의 더웨이브컴퍼니는 액셀러레이팅 프로그램과 더불어 초기 창업 기업에 리브랜딩, 공간 리뉴얼, 신규 비즈니스 모델 등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매니지먼트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2021년에는 소셜벤처 육성을 위한 로컬 임팩트 트랙을 추가할 예정이다.


F&B 시장에서는 로컬 크리에이터를 기획하는 비즈니스가 형성돼 있다. F&B 기업의 비즈니스 모델은 크게 학교·지분투자 모델이다. 경리단길을 개척해 유명해진 기업가 장진우는 미래 창업자를 위한 학교를 운영한다. 장진우 가게에서 일하는 경험 많은 요리사들이 학생들을 직접 교육한다. 장진우 학교는 졸업생 중 우수한 학생들을 선발해 그들의 창업을 지원한다. 교육 -훈련 -창업으로 이어지는 전형적 도제 양성 시스템을 구축했다. 용산 열정도를 운영하는 청년장사꾼도 직원이 새로 창업할 때 지분을 인수하거나 매출을 공유하는 방식으로 그 기업에 투자한다. 창업가를 회사 내에서 훈련시켜 창업시킨다는 점에서 창업가를 체계적으로 기획한다고 볼 수 있다.



임팩트 투자로 새로운 대안을 찾다

로컬 크리에이터 생태계에 특화된 비즈니스 모델이 필요한 또 하나의 분야가 투자다. 로컬 크리에이터는 한정된 로컬 자원을 활용하고 지역 시장에서 시작해 전국 시장으로 진출하기 때문에 확장성 측면에서 전통 벤처 투자자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그러나 의미 있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실리콘밸리에서 식당 창업에 투자하는 벤처캐피털이 생기고 있다. 워싱턴DC  사업가는 벤처캐피털VC 펀드를 조성, 다양한 식당을 동시에 기획하고 이들 식당에 투자한다. VC 펀드의 운영으로  기업은 다수의 식당에 투자해 위험을 분산시키고, 식당 경영에 대한 전문 지식을 축적한다. 한국의 부동산 운용 기업인 이지스자산운용도 청년 셰프가 창업하는 식당에 투자하는 펀드를 운용한다.


하지만 VC의 외식업 투자는 예외적인 사례다. 대부분의 VC는 개인 식당이 아닌 프랜차이즈 기업에 투자한다. 독립 식당으로는 벤처 투자가 요구하는 수익률을 맞춰주기 어렵기 때문이다. 근래 푸드테크 Food Tech 분야에서 상당 규모의 VC 투자를 유치한 기업은 원거리 맛집 배달 서비스, 온디맨드 배달 서비스 스타트업들이다. 로컬 크리에이터에게 새로운 대안으로 부상하는 투자자는 크라우드펀딩 투자자다. 한국에서도 와디즈, 비플러스 등이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로컬 크리에이터의 투자 자금을 모금한다.


골목산업에서 VC 투자의 진입 가능성이 낮다면, 대안은 소셜벤처를 지원하는 임팩트 투자사가 대안이 될 수 있다. 한국에서도 이미 골목상권 소셜벤처 사업이 시작됐다. 카우앤독, 루트임팩트 등의 성수동 임팩트 투자 기업과 한국콘텐츠진흥원, 한국사회적기업진흥원 등 소셜벤처 지원기관의 뒷받침으로 성수동의 오래된 공장 지역에 소셜벤처들이 들어섰다. 이들 중 상당수가 음식점, 소품, 디자인 등 골목 업종에 종사한다. 청정 재료를 사용한 한식당 소녀 방앗간, 스토리텔링 디자인이 담긴 소품 판매와 카페를 운영하는 마리몬드 라운지 등 개성과 가치를 담은 독립 가게들의 창업을 지원했다.


MYSC, 소풍벤처스, IFK임팩트, 크립톤, 퓨처플레이, 쥬빌리파트너스 등의 임팩트 투자사들도 사회적 기업을 표방하지 않은 로컬 기업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임팩트 투자 업계가 로컬 비즈니스의 사회적 가치를 인정한 것이다. 한 발 더 나아가, 임팩트 투자사가 지역경제 활성화와 독립 소상공인 지원을 위해 로컬 크리에이터를 지원하면, 이상적인 장인 기획사 모델에 가까운 기능을 하게 된다. 현재 임팩트 투자사가 소셜벤처를 보육하듯이, 로컬 크리에이터를 보육할 수 있다.


지속가능한 지역경제 발전과 생태계 구축을 위해서는 기획사, 투자사, 로컬 크리에이터가 한 지역에 집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근거리에서 협업하고 연대하고, 지역자원을 공유하면서 새로운 지역기반 비즈니스 모델을 실험해 그 지역의 로컬 크리에이터를 지속적으로 배출하는 것이 생태계의 과제다. 장인대학, 로컬 크리에이터 기획사, 임팩트 투자자는 아직 생소한 개념이지만, 로컬 크리에이터 산업을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비즈니스 모델이다. 전국의 기획자와 창업자가 혁신적인 장인대학, 기획사, 투자 모델을 개발, 지역과 골목 경제의 발전을 견인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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