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이후 오프라인 상권이 전반적으로 침체기로 접어들었지만 유일하게 성장세를 유지하는 상권이 연남동, 성수동, 을지로 등 젊은이들이 여행 가듯 찾는 골목상권이다. 골목상권이 정부의 직접적인 지원 없이 자체적으로 상권운영체계를 가동해 콘텐츠 경쟁력을 유지한 것이다. 그렇다면 골목상권에는 어떤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하는 것일까?
골목상권의 국내외 사례를 분석한 '골목길 자본론'은 골목상권의 OS(운영체계)를 C-READI로 요약한다. 성공한 골목상권의 OS는 공통적으로 문화 인프라(Culture), 임대료(Rent), 기업가 정신(Entrepreneurship), 접근성(Access), 공간 디자인(Design), 정체성(Identity) 등 6가지 축으로 작동한다.
C-READI는 또한 골목상권 성공의 조건이기도 하다. 정부가 골목상권과 같은 상권을 원한다면 상권 관리를 통해 6가지 조건의 실태를 평가한 후 부족한 부분에 자원을 투입해 상권 성공의 가능성을 높여야 한다. 골목길의 문화자산을 확충하고, 임대료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며, 골목 창업을 지원하고 필요 인력을 훈련·육성, 골목길 연결성과 대중교통 접근성을 개선하며, 골목길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한 공공재에 투자하는 것이다.
C-READI 모델은 단순하지만 새로운 접근 방식이다. 기존 연구가 문화자원, 임대료, 거리 디자인, 접근성을 강조한다면, C-READI 모델은 기업가 정신, 정체성 등 새로운 성공 요인을 제시한다. 영역별 성공 가능성은 다르다. 저층 건물과 걷기에 편한 거리, 주거지와 상업시설 공존 등의 복합적 공간 디자인과 편리한 대중교통 구축을 통한 접근성 개선은 정부가 비교적 쉽게 충족시킬 수 있는 조건이다.
그러나 지역 정체성을 드러내는 미술관과 공방, 적정 임대료의 유지, 개성 있는 가게를 창업해 골목문화를 선도하고자 하는 기업가 정신은 정부의 노력만으로 일궈내기 힘들다. 주민, 상인, 예술가, 청년창업가 등 골목길 주체들의 협력과 협조가 필수적이다. 국내외 성공 사례는 골목상권 지속 성장의 핵심이 골목문화 유지와 이를 발전시키고자 하는 공동체 의식에 있음을 보여준다.
성공적으로 성장한 골목상권은 공통적으로 뛰어난 창업자(E)가 접근성(A)이 좋고 골목 자원(D)과 문화 자원(C)이 풍부하지만 임대료(R)가 싼 지역에서 성공적으로 창업하고, 이를 본 다른 창업자가 주변에서 새로 가게를 열어 지역만의 정체성(I)이 뚜렷한 하나의 상권으로 발전시키는 과정을 거쳤다. 역으로 C-READI 기준을 만족하는 골목길은 성공적인 골목상권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높다.
C-READI를 CRE과 ADI로 구분하면, 각각 골목상권의 1단계, 2단계 성공 조건에 해당한다. 1단계 골목상권의 출발은 문화 자원(C)이 풍부하고 임대료(R)가 저렴한 지역에 진입한 기업가(E)의 역량에 달렸다. 2단계에서는 접근성(A)과 골목 자원(D)을 개선하면서 공동체 정체성(I)을 유지함으로써 안정적으로 성장한다.
여섯 개 조건의 영어 이니셜을 모아 조합한 C-READI(Culture-Rent-Entrepreneurship- Access-Design-Identity)를 발음하면, ‘문화가 준비돼야 한다(Culture-Readi)’를 의미한다. 모든 조건들 중에서 문화자원과 문화 정체성이 골목상권의 핵심 경쟁력임을 강조하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상권활성화 사업의 시작은 상권 현황 분석이다. 문화지구 성격이 강한 골목상권에서는 유동인구와 동선 중심의 전통적인 상권 분석 방식은 적합하지 않다. 오히려 골목상권의 경쟁력을 결정하는 C-READI 모델을 상권 현황 분석틀로 사용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골목상권을 활성화하고 싶은 정부에게 C-READI는 상권 현황의 체크 리스트다. C-READI 각 영역에서 현재 상태가 어느 수준에 와있고, 이를 더만족하려면 무엇을 더 해야 하는지를 입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서울역 상권의 사례를 보자. 서울시는 현재 문화, 임대료, 기업생태계, 접근성, 공간 디자인, 정체성 등 전 분야에서 다양한 사업을 진행한다. 제한적인 자원이 적절하게 배정되고 있는지는 더 논의해야 한다. 서울역 재생 사업에서 가자 아쉬운 부분이 정체성이다. 서울시는 서울역을 어떤 산업을 유치하는 상권으로 키우고 싶은가? 다른 지역에서는 정체성 확립이 어렵지만, 서울역에서는 오히려 쉬운 일이다. 서울역은 중앙역이다. 다른 도시의 중앙역과 같이 마이스산업, 숙박산업, 유통산업, 지방산업(지자체의 서울 오피스 또는 지방 제품의 서울 전시장) 등 중앙역에 자연스럽게 모이는 산업을 중심으로 발전해야 한다.
물론 정부가 C-READI 모든 영역에 개입할 수는 없다. 특히, 기업가 영역은 정부의 지원이 오히려 생태계를 '교란'시킬 수 있다. 청년 창업가들이 지역에서 생존할 수 있는 비즈니스 모델을 완성하기보다는 정부 지원 사업 수주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도 기업처럼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 그동안 경험을 볼 때 정부가 잘할 수 있는 일은 거리 조성과 문화시설 유치다.
지자체가 매력적인 골목상권을 원한다면 두 가지 일에 집중해야 한다. 걷고 싶은 길을 열어주고, 동네 정체성에 맞는 문화시설을 배치하는 일이다.
더 중요한 일은 골목상권 자체보다는 이를 통해 어떤 동네를 만들고 싶은지에 대한 비전이다. 코로나 이후 생활 반경이 좁아져 많은 사람이 동네 중심의 생활을 하고 이에 익숙해지고 있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지역은 주민이 동네 안에서 직주락 문제를 해결하는 생활권으로 재편되고 있다. 생활권 경제의 지속 가능성은 경제적 자생력에 달렸다. 홍대, 성수동 골목상권이 단계적으로 도시산업생태계로 진화했듯이, 앞으로 구축해야 하는 동네 중심 생활권도 지역 경제를 견인할 수 있는 로컬 브랜드를 배출하는 단계까지 발전해야 한다.
로컬 브랜드 생태계가 골목상권 사업의 궁극적인 목표다.
C-READI 모델에 의한 골목길 정책은 건축, 디자인, 문화기획, 경제학, 경영학 등 다양한 학문 지식이 접목되는 대표적인 융복합 정책이다. 정부가 꾸준히 관심을 갖고 지원한다면 전국 곳곳에 C-READI 조건을 충족하는 골목상권, 즉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골목상권 모델인 장인 공동체가 등장할 것이다. 사회의 관심과 더불어 시장 환경도 C-READI 모델의 확산에 우호적이다. 골목상권과 비 골목상권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골목상권 주체들도 공동체(골목상권 전체) 경쟁력의 중요성을 깨닫고 있다. 공공재와 골목 가치 투자를 유발하는 공동체 인식의 확산이 궁극적으로 골목상권의 지속 가능 발전에 가장 중요한 자산임을 잊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