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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목길 경제학자 Jan 03. 2018

도시재생의 정석, 서울로 7017

한 대학의 도시재생 수업이다. 교수가 사례 하나를 소개한다.

"역 중심으로 6개 동네가 밀집되어 있는 지역이 있다. 중앙역 서쪽 3개 지역은 상가와 수공업이 일부 들어선 낙후된 주택지다. 동쪽 3개 지역은 고층 빌딩이 들어선 상업 지역이다. 10차선 도로와 철길이 갈라놓은 6개 지역을 걸어서 이동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보행객이 없는 도시 거리는 사막과 진배없이 삭막하다. 동부와 서부를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는 고가도로다. 오래전부터 안전성 문제가 제기되어온 철거 대상이다." 

교수는 학생들에게 이 지역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찾으라고 질문한다. 과연 학생들은 어떤 대안을 제시할까?


'서울로 7017'이라는 보행로로 변신한 서울역 고가도로


뛰어난 건축가나 도시재생 전문가도 빌딩 숲에 묻혀 있는 철도 지역을 활기찬 도시 공간으로 만드는 아이디어를 내놓는 일은 간단하지 않다. 교수는 학생들이 제시한 대안을 토론한 후 정부가 실제로 선택한 대안을 공개할 것이다. 자신이 제시한 대안과 실제 선택을 비교하는 것이 사례 연구 수업의 매력이다. 학생 입장에서는 정답 없는 문제가 답답하겠지만.


교수가 공개한 정답은 (그러니까 정부가 실제로 선택한 대안은) 고가 공원 조성이다. 시장선거에 나온 정치인이 선거 공약으로 고가도로를 보존하고 보행로와 공원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내세웠고 당선 후 이를 실행에 옮겼다고 부연할 것이다. 이제 학생들의 반응은 어떨까? 과연 고가 공원을 정답으로 지지할까?


서울시민이라면 이미 이 사례가 박원순 시장의 '서울로 7017 프로젝트'임을 간파했을 것이다. 실제 상황의 평가자는 시민들이다. 시민 평가는 현재 진행형이다. 박 시장이 고가 공원을 제안한 그날부터 시작된 논쟁은 2017년 5월 개통된 이후에도 계속되고 있다.


'서울로 7017'은 과연 필요한 길일까? '서울로 7017'에 대한 수많은 평가 중 가장 와 닿은 말은 서울시 어느 공무원의 코멘트였다.


“서울로 7017은 공원보다는 길이라는 것에 중점을 두고 생각해주셨으면 합니다. 서울로는 사람을 중심으로 하는 도시 정책의 첫걸음입니다. 자동차가 다니던 길은 사람이 다니는 길이 되고, 주변 역시 걷기 좋은 길로 만들 계획입니다.”


그렇다. 공원에 대한 논란에 빠져 우리는 '서울로'가 길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서울로가좋은 길이고 필요한 길이면 그 자체로 인정받아야 한다. 공원으로서의 성공 여부는 그다음 문제다.


서울로 7017에서 펼쳐진 흥겨운 문화행사(좌)와 서울시가 내건 서울역 고가 공원 홍보 포스터 (우)


다시, '서울로'가 정말 필요한 길일까? 서울역은 서울의 중앙역이다. 중앙역이기에 외부 접근성은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중심 철도인 경부선의 종착역이자 공항철도역과 지하철역, 그리고 버스 환승장이 위치한 교통의 요지다.


서울역 주변이 통합된 지역으로 발전하는 데 가장 큰 장애물은 내부 연결성이었다. 내부 도로의 부재로 서울역 주변의 여섯 개 지역은 서로에게 섬 같은 존재였다. '서울로 7017'의 개통으로 이 지역들은 이제 도보로 연결되었다. 특히 서울역에서 명동으로 연결되는 중심도로는 공항철도를 이용해 시내로 진입하는 외국 여행객에게 쾌적한 보행로를 제공한다.


추가적인 보행로 사업이 진행되어 서울역 인근이 걷기 좋은 지역으로 탈바꿈한 미래를 상상해보자. 서울역에서 내려 남대문과 명동으로 걸어갈 수 있는 우리가 더 이상 도쿄역에서 내려 황궁, 긴자로 걸어가는 일본인을 부러워할 필요가 있을까? 만리동, 청파동, 중림동 등 서부 지역의 활용 가능한 관광 자원을 함께 누리게 됨으로써  광화문에 버금가는 서울 대표 관광명소가 될 것이다.


장기적으로는 지역 활성화 효과가 관건이다. “사람의 길이 열리면 경제가 살아납니다.”서울시의 서울역 고가 공원 홍보 포스터에 담긴 문장이다. 사람이 다니는 길인 고가 공원이 서울역 주변 경제를 살린다는 주장을 감성적으로 표현했다.


‘사람의 길’이 ‘경제의 길’이라는 말은 맞다. 유동인구가 늘어나면 도로변 상가를 찾는 사람이 많아진다. 서울시 주장대로 우리는 찻길로 둘러싸여 초거대 철도역의 잠재력이 주변으로 스며들지 못하는 서울역을 너무 오랫동안 방치해왔다. 서울역과 주변 지역을 살리기 위해서는 차가 다니는 길을 사람이 다니는 길로 대체해야 한다.


하지만 광화문 광장 조성과 청계천 복원 사업에서 목격했듯이 ‘사람의 길’이 저절로 ‘경제의 길’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광화문 광장과 청계천 산책길이 열렸지만 인접 상권이 활성화되었다고 느끼기는 어렵다. 이유는 간단하다. 보행길 바로 옆에 상가를 조성할 수 없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서울로 7017' 역시 비슷한 한계를 안고 있다. 고가 공원 역시 구조상 보행로 옆에 상가를 만들 수 없다.


결국 '서울로'가 경제적 효과를 내려면, 주변 지역 활성화를 위한 간접적인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문제는 서울역 주변 지역을 활성화하는 것이 어렵다는 데 있다. 오랜 시간 낙후되어 우울한 분위기가 조성된 지역에 쾌적한 공원이 하나 들어섰다고 해서 기업과 사람이 한순간에 모이기를 기대해선 안 된다. 광화문과 청계천 사업 때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과 공을 들여야 한다.


서울로 7017과 연결된 상가


골목길 경제의 진화 과정을 살펴보면 지금 서울역 주변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홍대, 가로수길, 이태원 등 서울을 대표하는 골목상권은 공통적으로 문화 인프라와 다른 지역과의 연결성, 골목길 인프라 등을 바탕으로 성장했다. 이들 거리는 골목상권이 들어서기 전에도 각각 화랑, 건축사무소, 외국인을 위한 편의시설이 갖춰져 있는 곳이었고, 이 시설들을 중심으로 예술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자주 찾았다.


반면 중림동, 공덕동, 청파동 등 서울시가 '서울로'를 통해 개발하려는 서부지역은 아직 1세대 골목상권만큼 문화 자원이 무르익지 않은 상태다. 서울시는 서계동 국립극단을 앵커시설로 삼아 지역 문화를 활성화한다는 계획을 발표했지만, 공연장만 덩그러니 있는 국립극단 주변이 문화 중심지로 발전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인프라와 더불어 인근 상권 연결성도 부족하다. 서울시는 명동과 남대문시장을 찾는 관광객과 쇼핑객이 고가 공원을 통해 서부지역으로 이동할 것이라고 기대하지만, 이는 명동과 남대문 상권이 서부지역으로 확산될 때 가능한 이야기다.


최근 성장하고 있는 연남동, 상수동, 합정동 등 홍대 주변 지역의 사례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저렴한 임대료를 찾아 골목상권이 주변으로 확산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문제는 명동과 남대문 시장이 전통적인 골목상권이 아니라는 데 있다.


대기업 프랜차이즈나 도매상을 중심으로 상권이 형성돼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임대료가 낮은 다른 지역으로 이전하는 가게가 많지 않을 것이다. 또 이들 상권과 '서울로'를 연결하는 골목길이 없는 것도 상권 확산의 약점이 된다. 그렇다고 서울역 고가 공원의 성공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서부지역의 풍부한 골목길 인프라를 활용한다면 ‘경제의 길’이 될 수 있다.


대규모 상업시설과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지 않은 만리동, 서계동, 청파동, 중림동은 옛 골목길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골목마다 개성 있는 가게와 음식점이 들어설 수 있는 환경은 골목상권 조성의 필수 조건 중 하나다. 이미 만리동 입구 지역에는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서울로'가 개통되면서 오래된 건물을 활용한 특색 있는 카페와 커피 전문점이 들어서기 시작한 것이다.


ⓒOssip van Duivenbode


앞으로 서울역 골목길 경제를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


우선 서부지역으로 예술가들이 모여들 수 있어야 한다. 새로운 문화시설을 유치하기 어렵다면 기존 문화시설을 국립극단 주변으로 이전하는 방안도 괜찮다. 또한, 기존 상권과의 연결성을 극대화하는 것도 필요하다. 고가 공원 동부의 남대문시장과 명동을 서부의 가장 가까운 상권인 숙대입구와 자연스럽게 연결하는 것이다. 기존 상권과 서울로 사이의 거리를 걷고 싶고 볼거리 많은 보행로로 만드는 것이 고가 공원 사업의 성패를 결정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서부지역에 대규모 건설 사업을 추진하는 것을 지양해야 한다. 골목길 인프라를 보전하는 방향으로 서부지역을 재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건축가 황두진의 지적대로 서울은 5층 규모의 주상복합 건물로 도시 보편성에 맞는 밀도를 유지해야 한다.


국내 철도망의 중심지이자 공항철도의 시발점인 서울역은 우리나라의 얼굴이나 다름없다. 차량과 철로로 둘러싸인 채 노숙자 밀집지역으로 방치되고 있는 서울역을 재생하는 것은 우리나라의 자존심을 회복하는 일이기도 하다. 서울로를 시작으로 서울역 주변에 수많은 ‘사람 길’이 열리고 서울역이 선진국 도시의 중앙역과 같이 문화와 비즈니스의 중심지로 기능하기를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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