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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목길 경제학자 Apr 10. 2024

상권 기능에 대한 오해

상권 기능에 대한 오해


최근 상가 공실률 증가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수도권과 지방, 원도심과 신도심을 가리지 않고 전국적으로 상가 공실 문제가 심각한 수준이다. 공실률 상승의 주된 원인으로는 온라인 쇼핑의 증가로 인한 상가 수요 감소와 신도시 개발 및 원도심 재개발을 통한 상가 공급 증가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분석된다. 대규모 개발 사업으로 인해 공급된 상가의 규모를 고려하면, 수요를 넘어선 과잉 공급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서울연구원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서울시의 상업공간 면적은 2000년부터 2020년 사이에 무려 60%나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인구 증가율이나 소비 증가율을 크게 웃도는 수치로, 상가 공급이 실제 수요를 초과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전국 평균 임대료의 지속적인 하락은 상가 공실 문제의 심각성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한국부동산원의 자료에 의하면, 중대형 상가의 월평균 임대료는 2010년 제곱미터(㎡) 당 4만 2000원에서 2023년 2분기에는 2만 5600원으로 39%나 하락했다. 이는 과도한 상가 공급으로 인해 임대료 상승이 제한되고, 공실 해소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을 반영한다.


그러나 모든 상권이 동일한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은 아니다. 언론은 상가 공실 문제의 심각성을 지적하는 동시에, 상권 간 양극화 현상에도 주목하고 있다.


홍대, 한남동, 성수동 등 차별화된 경험을 제공하는 특정 상권에는 소비자들이 집중되는 반면, 그렇지 못한 다수의 상권은 침체를 면치 못하고 있는 것이다.


유통채널과 콘텐츠 생산지

이러한 상권 양극화 현상은 공실의 원인이 단순히 공급 과잉만이 아님을 보여준다. 소비자들의 기대와 선호가 변화하면서, 매력적인 콘텐츠를 생산하는 상권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음을 방증한다. 즉, 상권의 활력을 좌우하는 핵심 요소가 과거의 입지나 접근성 중심에서 콘텐츠 생산 능력 중심으로 이동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 도시에서 상권은 두 가지 핵심 기능을 수행한다. 첫째는 배후지 소비자에게 상품과 서비스를 전달하는 유통채널로서의 역할이고, 둘째는 상권 고유의 문화와 경험을 창출하는 콘텐츠 생산지로서의 기능이다.


유통채널로서의 상권은 접근성, 인프라, 상품 및 서비스의 다양성 등에 의해 그 활력이 좌우된다. 반면 콘텐츠 생산지로서의 상권은 크리에이터들이 선호하는 환경을 갖추고 차별화된 콘텐츠를 생산하는 능력에 따라 경쟁력이 결정된다.


그러나 언론은 경험 소비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정작 어떤 상권이 이러한 콘텐츠를 생산하는지에 대해서는 깊이 있게 분석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이는 여전히 상권을 전통적인 유통채널의 관점에서만 바라보기 때문이다.


상권의 매력도와 경쟁력을 판단하는 데 있어 콘텐츠 생산 능력이라는 새로운 기준이 적용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것이다.


유통채널로서의 상권은 접근성, 인프라, 상품 및 서비스의 다양성 등의 요소에 의해 그 성패가 좌우된다. 소비자들이 상권을 쉽게 찾아올 수 있도록 대중교통과의 연계성이 높고, 주차장과 같은 편의시설이 잘 갖춰져 있으며, 다양한 업종의 점포들이 고루 분포되어 있을 때 상권의 유통채널 기능은 극대화된다. 한국에서는 지하철역 역세권의 대로변 상권들이 이러한 유통채널로서의 역할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콘텐츠 생산지로서의 상권은 독특한 분위기와 경험을 창출할 수 있는 환경을 갖추고 있느냐가 관건이다. 개성 있는 건축물들, 걷기 편한 가로 환경, 다양한 문화 자원 등은 창의적인 인재들을 끌어들이는 마력을 발휘한다. 나아가 이러한 공간적 특성을 바탕으로 지역 고유의 스토리와 정체성이 만들어질 때, 상권은 외부 방문객들까지 유인하는 콘텐츠 생산지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서울에서는 삼청동, 익선동, 연남동, 한남동, 성수동 등 역사적 건축물과 독특한 도시 조직을 간직한 원도심 골목상권들이 콘텐츠 생산 기능을 수행하며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골목길 자본론'에 따르면 콘텐츠 생산지 상권의 성공 요인은 C-READI라는 6가지 조건으로 요약된다. 이는 문화 인프라(Culture), 임대료(Rent), 기업가 정신(Entrepreneurship), 접근성(Access), 도시 디자인(Design), 정체성(Identity)을 의미한다.


성공적인 콘텐츠 생산지 상권의 성장 과정을 살펴보면, 대개 뛰어난 창업자(E)가 접근성(A)이 좋고 골목 자원(D)과 문화 자원(C)이 풍부하면서도 임대료(R)가 상대적으로 저렴한 지역에 자리 잡는 것에서 출발한다. 창업자의 성공 사례를 보고 영감을 얻은 다른 창업자들이 그 주변으로 모여들면서 특색 있는 점포들이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지역만의 뚜렷한 정체성(I)이 형성되고, 고유한 문화와 콘텐츠를 생산하는 매력적인 상권으로 발전하게 된다.


정리하면, 저렴한 임대료와 우수한 접근성이라는 입지적 장점 위에 창의적인 창업자의 도전이 더해지고, 지역 고유의 문화적, 물리적 자원이 활용되면서 차별화된 콘텐츠를 생산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는 것이다. 여기에 독특한 도시 디자인까지 갖추어질 때 그 지역만의 강력한 정체성이 확립되고, 상권의 브랜드 가치가 크게 높아지게 된다.


상권재생의 방법

신도시와 혁신도시 상권이 활성화되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상권 재생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과거 정부는 주로 낙후된 전통시장 활성화에 주력해 왔으나, 이제는 신도시 상권의 재생에도 정책적 역량을 집중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전통시장 활성화에 적용되던 시설현대화, 디지털 전환, 상권 마케팅 등의 기존 방식은 신도시 상권에는 큰 효과를 거두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최근 소비 트렌드를 볼 때, 소비자들은 단순히 상품을 구매하는 것을 넘어 특별한 경험과 콘텐츠를 제공하는 상권에 더 끌리는 경향이 뚜렷하다. 따라서 유통채널 중심의 상권을 콘텐츠 생산지 상권으로 전환하는 것이 상권 활성화의 핵심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다만 모든 상권이 콘텐츠 생산지로 탈바꿈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상권별로 입지적 특성과 발전 잠재력이 다르기 때문에 이에 맞는 차별화된 재생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콘텐츠 생산지로의 전환이 유망한 상권은 '골목길 자본론'에서 제시한 C-READI 조건, 즉 문화 인프라, 합리적인 임대료 수준, 기업가 정신, 양호한 접근성, 매력적인 도시 디자인, 지역 정체성 등을 충족할 수 있는 곳이다. 이런 상권은 지역 고유의 문화자원이 풍부하고, 건축과 보행 환경의 개선만으로도 창의적인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추고 있다.


이들 상권의 콘텐츠 생산 능력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공공과 민간이 협력하여 종합적인 재생 사업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 노후 건물 리노베이션, 가로 환경 정비, 광장과 공원 조성 등 물리적 환경 개선사업과 함께, 빈 점포를 창작 스튜디오, 메이커 스페이스, 복합 문화공간 등으로 활용하는 것도 효과적인 방안이 될 수 있다. 여기에 지역 예술가, 장인, 스타트업 등 콘텐츠 생산 주체 유치와 이들 간 협업 촉진을 위한 비물리적 지원책도 병행되어야 한다.


입지여건이나 문화적 자산이 부족해 콘텐츠 생산기능 수행이 어려운 상권은 용도 변경을 통해 상가 공급을 줄이는 것이 바람직하다. 장기 공실로 인해 상권 전체의 이미지와 집객력이 나빠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최근 뉴욕 등 해외 대도시에서는 유휴 오피스 건물을 주거용으로 전환하는 사례가 늘고 있는데, 이는 국내 상권 재생에도 참고할 만하다. 숙박, 주거, 업무, 문화 등 실수요에 기반한 용도 변경을 통해 빈 건물의 활용도를 높이고 상권 기능을 다각화함으로써 상권의 지속가능성을 제고할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상권 쇠퇴 문제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려면 상권을 유통채널과 콘텐츠 생산지라는 두 가지 관점에서 바라보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그리고 각 상권의 여건과 잠재력에 맞게 콘텐츠 생산기능을 강화하거나 용도전환을 통해 유통기능을 재조정하는 등의 맞춤형 처방이 이뤄져야 한다.


결론적으로 도시 상권 문제는 단기적인 공실률 해소나 소상공인 지원 차원을 넘어 장기적인 도시 경쟁력 제고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AI 등 자동화 기술의 발전으로 일자리 창출에서 자영업과 소상공인의 역할이 더욱 커질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이들이 성장할 수 있는 건강한 상권 생태계를 조성하는 것이 도시 경쟁력의 핵심 요소로 부상할 전망이다.


아울러 창조경제 시대를 맞아 도시의 창의성과 혁신을 주도하는 창조인력 유치 경쟁도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다. 이들 창조계층이 선호하는 도시는 독특한 문화와 경험, 영감을 제공하는 매력적인 상권을 다수 보유한 곳이다. 개성 있는 콘텐츠를 생산하는 상권은 지역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고, 나아가 도시 전체의 창조 이미지를 제고하는 데 크게 기여한다.


따라서 도시가 지속가능한 성장동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상권의 콘텐츠 생산 기능 강화에 전략적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


건축·보행 환경 개선, 지역 문화자원 활용, 창의인재 유치 등을 통해 상권의 매력도와 경쟁력을 높이는 정책적 노력이 필요하다. 뉴욕 브루클린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정부와 민간이 협력하여 쇠퇴한 상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창조 생태계로 변모시킨 도시들이 새로운 성장의 기회를 맞고 있다.


우리의 도시들도 '장사하기 좋은' 상권을 넘어 '창의성이 살아 숨 쉬는' 상권 조성에 역량을 집중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중앙정부와 지자체의 정책적 지원, 상인과 건물주의 혁신 의지, 창조인력의 활발한 참여가 선순환을 이뤄야 한다. 상권재생을 통해 도시 전체에 창조성의 열기를 확산시켜 나갈 때,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새로운 도시 경쟁력을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허자연 외, 서울시 상업공간 수급현황과 입지행태 변화, 서울연구원, 2021

김동인, 수도권도 예외 없는 상가 공실 문제, 시사In, 2023.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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