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은 아웃풋이 더 많은 시기다.
인간이 나이를 먹는 과정에는 이름이 붙여져 있다.
영아, 유아, 소년, 청년, 중년, 노년...
이런 명칭이 왜 만들어 졌는가를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우리 인간은 성장하는 존재이고 성장 단계에 따라 다른 삶의 과정을 겪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처럼 단계를 나누는 유일한 요소는 나이인데, 이는 다만 통념으로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몇 살이 되어야 중년일까?
통념은 대체로 40대 중반에서 50대 후반까지를 중년으로 여기는데, 과연 맞는가?
그리고 중년에 대한 통념은 인생에서 성숙기와 쇠퇴기가 겹치는 시기로 전환기라는 것인데 이 생각은 과연 맞는가?
더구나 수명이 길어지고 사회활동을 하는 시기가 연장되면서 이런 통념과 현실은 불일치해졌고 단순하게 나이로 인생을 나누는 것을 동의하기란 어렵게 되었다.
중년은 아직 사회에서 활동할 의지가 있고 능력이 있다.
또한 인생에서 추구하고 경험하고 싶은 목표가 있으며 기대가 있다.
나는 어떤 인생의 시기에 있는가? 중년은 전환기라는 사회 통념을 인정할 이유는 없다.
중년기에 도달한 사람들의 생각과 현실의 불일치를 표현하기 위해 새로운 말이 등장했다.
꽤 알려진 말로 '신중년'이라는 말이 있는데, 내게 이 말은 중년의 생각과 현실을 제대로 표현하는 말은 아닌 듯 싶다. 어쨌든 중년이라는 말에 담긴 다소 부정적인 뜻을 전제로 과거의 중년과 다른 새로운 중년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액티브 시니어라는 표현도 있지만 이는 어색한 표현이다. 열심히 삶에 몰입하고, 자신의 인생을 적극적으로 산다는 것을 강조하지만 자신이 살아갈 인생을 게으르게 혹은 욕망을 접고 뒤로 물러나 살려는 시니어는 없다. 인생은 늘 충실하고 충만한 삶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중년기를 사는 나는 내가 맞이한 인생의 시기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 어떤 삶의 단계를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나는 인생이란 인풋(받는 것)과 아웃풋(주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고, 인생의 단계는 이 인풋과 아웃풋의 비율이 바뀌는 과정이라고 상상해 본다.
인간으로서 우리는 모두 받는 것으로 삶을 시작한다.
모든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사건은 삶을 시작한 일이다. 곧 탄생이다. 탄생이 없다면 인생도 없었을테니까.
탄생을 선택한 사람은 그 누구도 없다. 모짜르트도 미켈란젤로도, 미국의 국민가수인 테일러 스위프트도, 인공지능을 이끄는 리더인 샘 알트먼도.
우리는 모두가 부모로부터 삶을 시작하고, 부모의 돌봄을 받으며 자라난다. 그리고 가족과 학교, 이웃으로 부터 배우면서 한 사람의 존재로 생각하고 일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해 간다. 어떤 사람은 종교와 다른 사회 공동체를 통해 성장하는 경험을 받는다.
한 사람의 독립적 존재로 자라나고 일할 수 있기까지 우리는 많은 것을 받으면서 성장한다. 즉, 인간은 인풋을 통해 성장한다. 이것은 인간 존재의 부인할 수 없는 조건이다.
그리고 어느 정도 성장을 하고 나서 차츰 아웃풋을 제공하기 시작한다.
아웃풋은 우리가 가족과 공동체, 일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제공하는 경험과 가치를 말한다.
가정을 꾸리고, 직장에 취업하고, 사회 공동체에 속해 다른 사람과 교류하고 행복한 경험을 나누고 유용한 상품을 생산한다.
청년기까지는 인풋이 아웃풋보다 많다. 그러다가 중년이 된다.
중년은 아웃풋이 인풋보다 최고로 많은 인생의 단계이다.
청년기까지 많은 인풋을 받아 삶을 시작하고, 배우고, 자신을 계발하고 성장해 왔다면 청년기에서 중년기에 이르는 시기는 점차 아웃풋을 제공하고, 이제 중년이 되면 축적된 배움과 경험으로 더욱 좋고 많은 아웃풋을 제공하는 시기에 이르는 것이다.
그리고 정말로 중요한 것은 아웃풋은 노년기까지 더욱 많아 질 수 있다는 점이다.
그간 자신에게 축적한 지식과 경험이 진정으로 가치가 있다면, 그리고 가치 있게 사용한다는 의지가 있다면 노년기까지 다른 사람들과 사회에 더욱 많은 아웃풋을 제공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50여년간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경영사상가 피터 드러커는 90세에 비로소 강의를 종료했다. 많은 오페라 대작을 창작했던 주세페 베르디는 80세가 넘어서 이전에 자신이 만든 오페라와는 질적으로 다른 희곡 <팔스타프>를 창작했다.
중년은 인생에서 아웃풋이 인풋보다 더욱 많은 시기이다. 그리고 더욱 정제되고 탁월한 아웃풋을 제공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한 시기이다.
그럼에도 중년기를 지나고 있는 어떤 사람이 삶의 정점을 지나서 하강기에 다다른 것 처럼 생을 생각하게 만드는 상황 또한 강력하다.
직장에서 일하고 있다면 은퇴를 생각하게 된다. 가정을 꾸린 사람이라면 이제 20대를 넘긴 자녀들이 대학을 졸업하거나 준비하고 있겠고, 혹은 결혼을 준비할 수도 있겠다.
이런 삶의 상황은 중년 이후의 인생이란 생을 어느 정도 살아왔고 새로운 무엇을 추구하기 보다는 정리하는 시기로 생각하도록 한다.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삶을 시작했고 가정과 사회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고 노력한 과정이 삶의 정점으로 이어졌고 이제부터는 산을 내려가는 하강의 과정이 앞으로의 삶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이런 생각의 입구에서 은퇴를 들여다 보게 한다.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 보면 은퇴는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장치에 불과한 것이다. 정년이라는 개념도 그렇다. 많은 사람들이 조직에서 일하는 조직 사회로 발전하면서, 중요한 삶의 과정을 조직과 함께 하면서 정년, 은퇴가 자연스럽게 인생을 구분하는 개념이 된 것이다. 그리고 은퇴하게 되는 환경이 자신의 역량과 가치를 은퇴와 연결되어 생각하게 만든 것이다.
가르치는 일, 정치하는 일, 창작하는 일을 살펴 보자. 인간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일이기도 하다. 이 영역에서 은퇴는 개별적인 선택에 달려 있다. 70이 넘어, 80이 넘어서도 일을 계속하는 사람들은 있다.
일이란 일하는 사람이 가진 정신능력과 신체능력이 있는 한 계속할 수 있는 삶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 주어진 근로수명이란 개념적인 것이고 불변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어떤 일을 하는가는 개인의 선택뿐만 아니라 기회와도 관련이 있다. 조직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그 기회가 마냥 연장될 수 없는 것인데, 이것은 경제적 현실이지 일 하는 사람의 가치와 노동력에 대한 절대적 평가에 의한 것이 아니다.
결국 정년이 되어 혹은 은퇴연령이 되어 은퇴하는 것은 개인의 가치와는 무관하다. 다만, 노동할 수 있는 기회가 달라 진 것이다.
중년이라고 해서 삶을 충만하게 살고, 자신의 가치를 추구하는 일이 중단될 수 없는 이유이다.
중년이 되었다는 뜻은 아웃풋을 더욱 많은 사람에게 더욱 많이 제공하는 인생 단계에 이르렀다는 뜻이다.
이런 중년 이후의 삶을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질문해야 한다.
나는 어떤 아웃풋을 사람들에게 제공할 수 있을까? 그리고 기대하고 있는가?
그리고 한 가지 질문이 더 필요하다. 어떤 삶의 영역에서 아웃풋을 제공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와 달리 삶의 영역은 달라질 수 있다. 젊은 시절을 함께 한 회사를 떠나야 하고, 돌보고 키워 왔던 아이들은 자신들의 삶을 살기 위해 떠난다.
아마도 원하던 일을 더욱 깊게 하거나 혹은 소망했던 새로운 일을 찾을 수도 있다. 또는 새로운 공동체를 무대로 삼을 수도 있다.
언제나 삶은 선택 속에서, 선택하는 과정 속에서 이루어진다.
이것은 삶은 늘 진행형이라는 뜻이다. 중년의 삶이라고 해서 멈춤이 될 수는 없다. 삶은 계속 살아가는 것이고 계속 활동하는 것이고 계속 경험하는 것이다. 다만 청년과 다른 점은 이제 아웃풋을 제공하는 방식과 무대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