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8-4, Paris, France
#다 모여 떠들었던 시간은
내게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홀로 가슴 후벼 파면
그제서야 날이 서
이것저것 잡다하게 듣는 건
나날이 더 많아지고
세상은 날 더디다고 비웃어
누군가 세로로 세우려 해
나란히 가로가 어울린 우릴
윤종신 - 세로 中
점심 식사를 마치고 나와 도착한 루브르 박물관. 꼭 보고 싶었던 곳이다.
가운데 불쑥 솟아난 투명의 피라미드. 큰 건물들에 둘러싸인 아담한 조형물은 새 둥지에 있는 알과 같다. 아끼고 싶고 보듬고 싶다. 몇 바퀴를 돌았는지. 계속해서 그 주변만을 맴돌았다. 끝내 간사하게도 어젯밤의 저녁식사를 잠시 후회하기도 했다.
“프랑스에 갔으면 루브르 박물관은 가봐야지.” 아마 프랑스에 가기 전에 가장 많이 들었던 말로 기억한다. 모두가 그렇게 칭송하던 곳. 그러나 나는 끝내 그 내부로 들어가지 않았다. 사실 애초에 들어갈 생각도 없었다.
내가 그곳에서 얻을 것이라곤 딱 이 정도였다.
"아 거기 가봤어. 그거 봤어." 허세가 잔뜩 들어가 자랑하듯 늘어놓을 몇 마디. 기회비용이 너무 큰 몇 마디.
자랑스러운 이야기는 결코 아니지만, 나는 그림 몇 개를 보고 문화적 소양이 늘어난다거나 미술적인 영감이 떠오르는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을 누구보다 매우 잘 알고 있다. 루브르 박물관의 내부를 관광하기에는 시간도, 관심도 크게 없었다. 눈썹 없는 한 여자의 그림을 보기 위해 그 수많은 인파를 헤치고 오랜 시간을 기다릴 인내심이 전혀 없었다.
또한, 이미 굳어진 결정에선 ‘약탈의 산물인 전리품들을 굳이 왜?’ 가끔 별 이유 없이 삐딱해지는 마음도 일조를 했다.
모두가 좋다고 하는 곳. 꼭 가봐야 한다는 곳. 진심 어린 주변의 말 몇 마디면 잠자코 물들 법도 한데, 늘 이런 연유로 동화되는 것을 뿌리친다. 나에게 있어 선택의 기준은 늘 내가 좋아야 했다. 생트 샤펠과 루브르 박물관의 차이점이 있다면 바로 그것이었다.
그렇게 난 편식하는 사람이었다. 이 고집은 대체 누굴 빼다 박았을까. 당장 뭐 먹을까란 물음에도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 이런 고집을 갖고 사는 것은 대체 무슨 속셈일까.
그늘진 난간에 기대어 계속해서 피라미드를 바라본다. 이렇게 꽤나 긴 시간이라면 박물관 내부를 관람해도 됐을 법했다. 유독 이 피라미드에 집착을 하게 된 것은 주변과는 전혀 색다른 이질적인 모습이었다. 그 느낌을 붙이자면 ‘튀다’라는 말은 왠지 차분하지 못한 것 같고, ‘독보적’이란 말은 주변과의 조화를 부정하는 것 같다. 딱 ‘독특’ 정도라 하고 싶은 그런 느낌이다.
‘독특’이 단어는 내가 추구하는 모든 것을 담고 있다. 막연하게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어디에 있어도 고유의 색을 갖고 있어 눈에 딱 들어오는 사람. 스쳐 지나감에도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리게 하는 향을 갖고 있는 사람.
피라미드를 계속 바라본 것은 그 특별함에 투영된 나의 모습에 대한 애착, 혹은 무력감 일수도 있겠다.
'좋아하는 일을 하자.' 그 모토대로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겠다 보다는 어떤 것들을 하는 사람이 되길 원했다. 더욱 구체적이지만, 그렇기에 더욱 막연한 그런 사람. 특별한 사람이 되고자 했건만 ‘특별’ 보다는 ‘특이’하게 보이는 그저 그 정도의 사람이 되었다.
갑자기 블로그를 만들고, 방의 벽을 페인트로 칠하고, 훌쩍 여행을 떠나고.
내가 택한 그 좋아하는 일들은 보통의 사람들에겐 평범한 일이 아니었기에 수많은 질문에 시달려야 했다. 그 질문의 뉘앙스는 나에 대한 질타이자 정곡을 찌르는 충고와도 같았는데, 나의 대답은 늘 한결같고 빈약했다.
"그냥, 하고 싶어서."
이러면 대화는 다른 주제로 넘어가거나 상대방의 끄덕임으로 종결된다. 어쩌면 나는 그 순간을 회피하기 위해 글자 그대로 해석한 대답을 던져 더 이상의 논쟁을 피했던 것 같다.
그러나 외적인 논쟁은 곧장 끝이 나지만, 내적인 갈등은 그 순간 시작된다.
삶을 풍요롭게 영위할 수 있는 수많은 수단들 중에서 왜 나는 그런 일들을 택했을까. 그것도 본업과는 전혀 관련 없는 일을. 막상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기에는 너무 커버린 머리가 삶의 무게로 다가와 가끔 고개를 푹 떨구곤 한다. 책을 뒤지다 보면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데, SNS에서는 YOLO라는 줄임말이 유행하는데, 그리고 내가 그렇게 사는 사람인데 말이다.
인생은 한 번뿐이라는 말을 신봉하면서도 계속해서 불안했다. 남부럽지 않게 사는 것. 누군가와 비교하지 않고, 나만의 길을 가자는 나름의 철학을 가지고 살아가려 했지만 이는 쉽지 않았다. 틀린 것 하나 없는 주변의 말은 OMR카드에 정확하게 채워진 정답 같았고, 나의 생각은 두서없이 써 내려간 주관식 서술과 같았다.
먼발치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면 내 삶이 애초에 설계가 잘못된 것만 같았다. 후에 어떻게 쌓아 올리더라도 무너질 것 같았다.
그런 연유로 나는 눈을 감고, 귀를 닫았다.
그렇게 고집스러워졌다.
언젠가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내가 떠돌고 있는 방황은 누군가에게는 이미 10여 년 전에 겪었을 진통이었을 것 같다는 생각. 일찍이 미래를 준비하는 주변 친구들에 비해, 철없고 무책임하게 치기대로 살고 있지 않은가에 대한 고민. 모든 일에는 그에 마땅한 시기가 있다는데, 나는 왜 늦깎이 신출내기가 되어 이제야 걸음마를 내딛으려 하는지. 해야 될 일은 계속 쌓여만 가는데 다른 일들을 자꾸만 끌어들여 삶을 오만가지 색으로 범벅을 만드는지.
피라미드에 비친 내 모습. 대뜸 프랑스 한가운데에 서 있는 내 모습에 묘한 이질감이 들었다. 네가 이곳에 있을 때냐고 묻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아무리 발악을 한들 내가 원하는 만큼의 독특함은 평생에 갖지 못할 터인데, 순간 이래도 되나 싶었다. 그것은 열등감과도 비슷했는데 요리조리 몸을 움직이자 창에 반사된, 뒤틀렸다 늘어났다 하는 내 모습이 지금의 마음 같았다.
남겨진 시간은 고민과는 상관없이 흐르고 있었다. 마냥 좋을 줄만 알았던 루브르 박물관의 피라미드는 평생의 질문을 내주었다. 현실로 돌아갈 때가 되어서인지, 더욱 현실적인 생각이 머리를 채운다. 가득한 고민으로 무거워진 몸을 이끌고 튈르리 정원으로 이동했다.
나와는 달리 세상 편한 사람들. 쨍쨍한 하늘과 상관없이 의자 하나, 돗자리 하나와 함께 이곳 사람들의 시간은 흘러간다. 녹조가 가득한 호수와 연두색의 의자. 그리고 온통 초록빛의 정원들. 피톤치드를 그대로 맡는 듯하다. 초록의 세상이다. 후에 누군가가 이곳의 사진을 본다면 아마 십중팔구는 봄이라고 느끼리라.
초록색이 주는 편안함. 그 기운에 긍정적인 마음이 다시 샘솟는다. 그렇게 싫어하던 비둘기도 참새같이 귀여워 보이는 이곳에서 그 녹음의 품에 살짝 몸을 기댄다. 옷을 통해 물든 색의 기운은 얼굴의 미소로 번진다. 그 위로 스며든 햇빛으로 인해 눈은 잔뜩 찡그렸지만 말이다. 그 덕에 마치 피에로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찡그린 눈은 기어코 보고 말겠다는 의지였다. 선글라스를 끼거나, 다 내려놓고 시린 눈을 감아버리면 되는 일이었지만, 맨눈의 작은 틈 사이로라도 이 색깔을 담고 싶었다. 그 녹의 기운을 더욱 받고 싶었다.
울창한 도시의 공원. 본래 나무가 있던 곳에 사람이 터를 잡은 모양새이다. 사람이 살던 곳에 억지로 나무를 옮겨 심은 느낌이 아니다. 바닥에 트랙처럼 깔린 인공 고무라던가, 딱딱 들어찬 보도 블록이 없어서 좋다.
같은 자연과 같은 도시임에도 인공적이지 않은 것을 바라보며 이국적임을 느낀다. 역시 나무는 맨땅과 가장 잘 어울린다. 고개를 쓸어 올리자 흰색, 초록색, 파란색으로 이어지는 풍경. 단편적인 색으로 이야기하기엔 미안한 감정이 드는 곳. 이루 형용할 수 없는 색으로 이루어진 이곳은 눈이 쉬어가는 곳이다.
이름보다는 희미한 어떤 느낌으로 먼저 기억나는 것들이 있다. 그렇다고 별 감흥이 없어서 뇌리에 박히지 않은 것이 아니다. 이름을 뛰어넘는 느낌. 그 느낌이 너무 압도적이라 이름을 떠올리기도 전에 ‘거기’ 혹은 ‘그거’라는, 내뱉은 이름으로 대체되는 것들이다.
이 공원도 그랬다. 숲을 이루는 수많은 나무, 꽃, 풀들. 그것들은 특별한 이름 없이 각자의 색으로, 형태로 도시의 공원을 대표하는 독특한 느낌을 주고 있다.
나름의 독특함. 이것들을 바라보며 질문의 답을 어느 정도는 찾은 것 같았다. 주체가 없는 특별함. 그것들이 모여서 만들어내는 시너지. 내가 겪었던 경험들은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멋대로 자라고, 피어나지만 독특한 숲을 만드는 힘. 상당히 자기 합리 화적인 생각이지만 아무리 좋은 말도 받아들이거나 외면하는 것은 언제나 나의 결정권 아래에 있다.
대신 적절한 균형은 앞으로 필요할 것이라 생각했다. 나무 한 그루, 풀의 한 줄기가 더 빛나 보이는 것은 산이 아니라, 도시라는 특수한 곳에 적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내 걸음들은 삶의 연혁이 될 것이었다. 경험이라는 이름으로 여기저기 뻗친 수많은 발자국들은 반복된 실패와 시간의 낭비일 수도 있겠지만 부정적인 요소만으로 단정할 순 없을 것이다. 앞으로 나는 또 이런 고민에 자주 몸서리칠 테지만 이런 고민들은 내가 선택한 삶에서 감내해야 할 업이다. 그리고 스스로를 위안하는 마음도 알아야 한다.
더 이상 선명하게 보이지 않는 저편의 피라미드로 시선을 돌린다. 같은 범주에서 다른 생각을 만들어낸 그 느낌이 새롭다. 양쪽에 시선을 번갈아 두며 그런 생각을 했다. 지금까지 내가 뻗친 것들은 과연 잔가지일까 잔뿌리일까. 만약 전자였다면 사회의 룰에 따라 가지치기하듯 쳐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후자라면 언젠가는 온갖 자양분을 흡수하는 매개체가 되지 않을까. 그리고 나는 후자에 마음이 더 간다.
먼 훗날 이 나무는 어떻게 되어 있을까.
잎이 돋아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아래로든 위든 풍성한 나무가 되지 않을까 싶다. 독특한 나무로 말이다.
Season.1 - 안녕. 그리고 안녕
[Spain, France] by.mindmo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