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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man Jan 21. 2024

연쇄 실연 17범의 고백 2-3

박스 바깥으로 나오다

(그림 출처: Dall.E 3로 그림)


2-3 박스 바깥으로 나오다


"LOSER 17"의 어머니는 사랑으로 가득한 이였다. 적어도 아이가 태어나서 품에서 자라는 동안엔 "무조건적인 사랑"을 심어 주었다.


말을 알아들을 영아기 때부터 수없이 했던 어머니의 말을 "LOSER 17"은 귓가에 붙어 있는 것처럼 떠올리면서 항상 기억해 냈다.


"네가 어떤 사람이 되던 너의 삶은 그 자체로 항상 가치 있는 거야. 그걸 잊지 마. 나는 아무런 조건 없이 항상 너를 사랑해". 그 말은 진심으로 그의 안으로 스며들었다.


마치 바람이 빠진 공처럼 마음이 위축되더라도 항상 힘을 내겠다는 의지가 자기도 모르게 내부로부터 생겨서 다시 그 공에 바람을 채워주는 마법과도 같았다.


비록 반복되는 아버지의 폭력에 자기 반영은 깨어지고 모기와도 같은 형상으로 변하고, 인생에 대한 시야가 어두워지고 좁아졌지만, 자신은 충분히 살아갈만한 이유가 있는 존재라는 감각은 그에게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만이 떨어진 비극 속에서 다시 튀어 오를 수 있는 힘이 되었다.


당시의 한국의 정규 교육 과정은 고등학교까지 무료였다. 일찍 직업을 갖고자 한다면 직업 훈련의 기회를 다양하게 제공했지만, 여전히 90% 가까운 고졸자는 대학교에 입학하고자 했다.


대학교에 입학하게 될 경우의 등록금은 세계 2위 수준이었지만 해외 유학이 가능한 집안의 자제를 제외하고는 어쩔 수 없이 내야만 했다.


사교육은 아이들 간의 학업 경쟁에서 이기고 입신해야만 한다는 한국적 사상에 변화가 없었기 때문에, 여전히 커다란 비용을 지출하게 만드는 함정이었다.


"학원 선생"등을 통해서 배우기보단, "특화된 맞춤형 교육 시스템"을 표방한 AI 교육 프로그램이 환영받았는데, 프로모션 베타 서비스 이후의 비용은 싸지 않았다.


인구 감소로 인한 구인난으로 수많은 기업이 경쟁력을 잃고 도산하거나 해외 이전하는 현상이 가속화되었다.


AI의 발달 등으로 인한 전방위적인 산업의 구조 개편과 지식정보의 가파른 변화는 대학 등에서 배운 지식을 가진 이의 가치를 실시간적으로 떨어뜨렸다.


대학과 취업 사이에 "직업 훈련 기관"등에서 추가적인 교육과 훈련을 받아야 할 필요가 생겼다. 하는 일에 관련된 지식과 정보를 갱신했음을 주기적으로 시험 등으로 증명해야 했다.


증명이 안 되는 상황에서 AI로 대체당하지 않을 충분한 이유마저 없다면, 근무 여건이 좋은 사기업이나 공기업의 직장인은 매년 10%가량 평균적으로 퇴출당했다.


기업은 준경력자급의 바로 일할 수 있는 직원을 원했다. 보다 길어진 교육 및 훈련 기간을 마치고 입사하는 평균 입사 연령이 40대가 되었다.


수많은 한국의 영상물에서는 50~60대의 연애를 다룬 멜로물이나 육아물이 주로 만들어졌었다. 법적인 정년은 80세였지만 자살률은 통상 해고 연령대인 70대 이후에 폭증했다.


노산을 극복하고 40~50대에도 건강한 아이를 낳을 수 있도록 하는 의과 기술이 발달했었지만 산부인과는 사라졌다.


의료 부문 최초로 산부인과 의사와 간호사가 AI로 대체되었다. 하지만 출산율이 "0" 수준이어서 의료 사고 등이 거의 발생하지 않아, AI 대체 성공 사례로 국회에서 보고됐던 바가 있었다.



"LOSER 17"의 아버지 또한 50대에 아이를 낳았다. 식이와 운동, 미용, 성형, 화장 등의 발달로 이 연령에도 얼핏 30대로 보일만큼의 동안을 가진 이가 있었고, 그도 그중에 하나였다.


기억력과 사고력, 활력을 증진시키는 의약품 등이 있어서 꾸준히 처방에 맞게 복용한다면 50대에도 30대 수준의 체력과 사고 능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도 낮에는 그러했다.


치밀하게 자기 관리를 해야만 "직업"을 유지할 수 있었던 때에 바닥에 가까운 "인사고과"를 받았다. 철밥통인 줄 알았던 특급 공무원 "핸들러"였지만 "가정폭력범"으로서 퇴출당했다.


원래 그에게 "주사"라는 것이 없었고 평판이 나쁘지 않았다면 어느 보안 시스템 업체에든 가서 일할 수 있어야 정상이었다. 그러나 바닥에 이른 평판은 세간에 알려졌고, 실업의 기간은 길어졌다.



"LOSER 17"의 아버지는 살던 월세집을 처분하고 몇 단계를 거쳐 더 저렴한 곳으로 옮겨가다가 당시에 한국에 남아 있었던 "반지하방"으로 옮겼다. 방음은 여전히 잘 되었다.


벽에는 곰팡이가 펴 있었고, 자고 일어나면 눅눅함이 몸을 짓눌렀다. 초등학생에서 중학생이 되면서 "LOSER 17"은 반에서 꼴등이 되었다. 아버지는 그 원인이 자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공부라는 것이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이 필요 없는 존재란 절망의 바닥까진 간신히 이르지 않았지만 모기만도 못한 자신이 꼭 살아 있어야 할까란 생각이 번지기 시작했다.


학교와 집을 오가며 "인터넷"에 연결된 모든 기기를 붙잡고서 "죽음"을 잊을 수 있게 해 줄 만한 것을 찾아서 마치 미치기라도 한 것처럼 닥치는 대로 보고 읽고 경험했다.


주로 고전과 철학서, 소설, 사회과학서적, 정신분석학, 사이버 심리학, 자기 계발서, 만화, 애니메이션 등의 글과 영상을 찾아 검색되는 대로 거의 모두를 꼼꼼하게 봤다.


그런 내용을 보다 보니 그 내용을 토대로 가공한 것으로 보이는 다양하고 세밀한 정보로 무장한 시뮬레이션 게임에 관심을 갖게 되어 여기에 몰입했다. 어머니가 보내준 용돈은 모두 여기에 쓰였다.


그 시뮬레이션 게임은 다양한 지역과 국가의 고대사와 근현대사, 현대사의 내용을 게임의 세계 속에 풀어놓고, 연결된 다양한 지식과 정보를 꼼꼼하게 재현해 냈다.  

"LOSER 17"처럼 현실이 너무 절망적이어서 자신이 더 살아야만 할까란? 질문이 있는 인물이 이 게임을 하게 된다면, 중독적으로 빨려 들어갈만한 요소가 많이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게이머에겐 머리에 쥐가 날 만큼 재미없고 진입 장벽이 높은 게임이었다. 게임을 잘하기 위해선 기본적으로 다양한 지식을 갖고 있거나 그 게임 안에서 학습해야만 했다.


사용자는 소수였지만 그 난이도 높은 게임에 대한 충성도가 높았고, 그 게임의 각 단계를 각자의 힘이나 협력으로 클리어해 낸 게이머들은 세계의 중요한 존재가 되기라도 한 것 같은 자부심을 느꼈다.


"LOSER 17"은 2년여간의 몰입 끝에 10여 명의 최상위자 중에 하나가 되었다. 집에 가면 거의 매일 영문 모르고 얻어맞는 아이인 현실은 변하지 않았지만, 게임에서 배운 내용의 도움으로 성적이 오르기 시작했다.


그의 반영은 초라한 모기에서 조금씩 "새"같은 모습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하루하루가 죽음으로부터 조금씩 삶을 향해 가고 있던 어느 날, 같은 반의 여학생 하나가 자신에게 흥미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사람이 관리하지 않는 스마트 팩토리"를 설계하고 만드는 부유한 "AI 플랜트"회사의 경영자가 그의 한국인 아버지였다. 국내외 언론에 나온 나름 유명인이었다.


그 여학생은 원래 초등학교는 특권층이 주로 가는 수업료가 일반인의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의 사립 초등학교를 다녔지만 중학교를 일반 공립으로 오게 된 특별한 케이스였다.


입학 시에 본 평가 시험에서 그는 1등을 했었고, 전교생 대표로 강당에서 선서를 했었다. 모두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약간 유럽계 혼혈의 갈색 머리에 큰 키, 큰 눈, 하얀 피부, 오뚝한 콧날, 호리호리한 몸매에 기다란 다리를 가진 비현실적인 외모를 갖고 있었다. 아이들은 그를 "커피색 머리"라고 불렀다.

고고한 자세에 점심 시간이나 쉬는 시간에도 주변 아이와 이야기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친구도 같은 반 내엔 없었기 때문에 그의 "신비주의"는 많은 관심을 "남녀" 모두에게 불러일으켰다.


그런데 그가 수업 시간마다 "LOSER 17"을 쳐다보고 눈짓을 했고, 쉬는 시간마다 말을 걸어왔다. 반에서 최하위권에 가난한 집안의 남자애에게 왜 관심이 간 걸까?



"이제야 첫사랑이 등장하는군. 맞나?"

"LOSER 17"과 이야기를 시작한 지 한참이 지나서야 이제 제대로 그의 의식을 통해서 그가 사랑했던 여자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아 "마스터"가 배정한 회로망이 설정되었던 대로 가동이 되기 시작했다. 기계적 활력이 생긴 때문인지 그의 목소리는 약간 밝았다. 아직도 "LOSER 17"은 그게 자신의 의식의 목소리라 믿지만.


"그래. 이제 나왔어. '커피색 머리'. 커피처럼 쓰고 정신 차리게 만드는 그 애 이야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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