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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abnsool 밥과술 May 23. 2020

육개장의 추억

빨간 콩나물을 찾아 헤맨 수십 년

빨간 기름이 둥둥 뜬 국물 안에 밥이 들어있는 음식이었다. 숟가락으로 뜨면 고소하게 국물이 밴 밥알과 함께 콩나물이 수북하게 얹혀 나왔다. 그렇게 맛이 있을 수가 없었다.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너무도 생생하다. 그때는 '고소한 국물이 밥알에 뱄다'던가 '숨이 죽은 콩나물의 식감' 이런 표현은 말할 나위도 없고 맛조차도 이렇게 하나하나 느낄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냥 되게 맛있게 먹었다는 기억만 강렬하게 남아 머릿속을 맴돌았다. 


따뜻한 햇살에 제법 콧잔등에 땀방울이 맺히는 늦은 봄날이었을 것이다. 집에서 도배를 하는 날이었다. 벽지를 새로 바르고 미닫이 문에 창호지를 갈고 하는 날이었는데 도배를 전문으로 하는 인부들이 두세명 왔던 것 같다. 그들에게 점심을 대접하면서 나도 함께 먹었던 '빨간 콩나물국'과 함께 그날의 정경이 눈에 어린다. 머리에 더러운 수건을 질끈 동여맨 일꾼들이 후루룩후루룩 맛있게 먹는 걸 보았다. 따스한 햇볕이 내리쬐는 이른 오후에 늘 그렇듯이 낮 닭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당시에는 서울의 주택가에서도 닭을 키우는 집이 꽤 되었던 것 같다. 다리에 끈을 묶어 한두 마리를 키우며 계란을 얻어먹던가, 마당에 닭장을 짓고 제법 여러 마리를 키우는 집들이 적지 않았다. 


방금 전 밥 먹기 전에 나에게는 즐거운 임무가 하달되었고 그걸 훌륭하게 완수한 나는 상당히 기분이 좋았다. 미닫이 문의 창호지를 새로 바르려 하니 창살 사이사이로 구멍을 내도 좋다는 거였다. 그런 문이란 게 손을 잘못짚어서 구멍을 내거나 하면 혼이 나는 법이었는데 그걸 허가를 맡고 구멍을 내라니 어찌 신이 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조그만 주먹으로 쳐서 뻥뻥 구멍을 내는 건 참 유쾌한 일이었다. 그 뒤에 도배꾼들이 입에 물을 잔뜩 머금고 새로 바른 창호지에 푸푸 뿜어내는 걸 보면서 좀 더럽다고 느끼기는 하였지만. 물을 축여놓아야 마른 뒤에 팽팽해진다는 팽창과 수축의 물리 원칙은 더더욱 알 리가 없었고.   


이날은 지금 헤아려보니 내가 다섯 살 때 겪었던 날이다. 학교를 다니기 전의 아동이라 낮에 집에서 혼자 노는 게 직업이었는데 마당에 나무로 짜 놓은 평상에 뚝배기째 들고나가 밥을 먹었다. 아마도 어머니나 집에서 일하는 누나가 쟁반에 담아 가져다준 것이겠지. 워낙 입이 짧았던 아이라 펑펑 퍼먹는 것만 해도 대견스러워, 하자는 대로 다 해주시던 어머니 덕에 나는 집안 여기저기를 쏘다니며 밥을 먹곤 하였다. 밥을 먹는 동안 낮 닭이 한적하게 울었고 마당에는 나비가 몇 마리 날아다니고 있었다. 


마당에는 좁게 앉으면 네 명 정도가 올라갈 수 있는 평상이 있었고 그 앞으로 화단이 있었다. 왼쪽에 라일락 나무가 있었고 오른쪽으로는 어린 눈에 보기에 꽤 큰 전나무가 있었다. 그 두 나무 사이로는 화초가 자라고 있었는데 닭 볏 같은 꽃이 자라는 맨드라미, 그리고 나팔꽃이 있었다. 그 옆으로 봉숭아도 있어서 여름이면 누나가 손톱에 물도 들이곤 하였다. 나는 건드리면 톡 터지는 게 재미있어서 씨도 받기 전에 다 터뜨려 버려서 나중에 누나한테 뭐라고 말을 들었다. 그러고 보니 그 옆으로 꽈리도 자라서 그걸로 누나랑 친구들이 꽈드득 꽈드득 소리를 내며 꽈리를 부는데 나는 아무리 해도 안되어서 분하게 여겼던 기억이 남아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 집이 당시에 서울에서 잘 사는 집이 아니었는데 이렇게 화단을 가꾸어 가지가지 꽃을 심고 했던 것을 보면 사람들은 주어진 환경 속에서 나름대로 꿈을 키우고 아름다움을 찾으며 사는 게 아닐까 싶다. 한국에서 살아온 우리 세대의 거의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집도 이사를 참 많이 다니며 살았다. 그래서 형제들끼리 어디 어디 살 때라고 이야기할 때마다 무슨무슨 집이라고 편의상 붙인 이름이 있는데 이 집은 '후생주택'이라 불렸다. 예를 들어 지금도 '우리 후생주택 살 때...' 이런 식으로 말한다. 


어려서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후생주택이라 불렀는데, 50년이 지나 검색을 하여보니 휴전 이후 미국과 운크라, 그러니까 유엔 한국재건단이라는 단체의 원조로 전후 복구를 위하여 생겨난 각종 하우징 프로젝트의 하나가 후생주택이다. 이밖에도 재건주택, 문화주택, 영단주택 등의 이름으로 불리는 주택이 보급되었다는 걸 최근에 알았다. 검색에 뜬 이미지 사진을 보면 그다지 예쁠 것 같지 않은데 내 기억 속에는 그 동네 집들마다 다 아기자기 예쁘게 꾸미고 살았던 것 같다. 


화단만 해도 봄에서 여름까지 갖가지 꽃이 돌아가며 피었고 가장자리로 채송화를 줄지어 심어서 화단의 경계를 만든 집이 많았다. 이파리가 만지면 촉감이 대단히 보드라워 좋았던 게 채송화에 대한 기억이다. 화단에 조그맣게 그네를 매어 놓은 집도 많았다. 집집마다 아이들이 많았던 시절이었다. 가을에 화초가 시들면 그 자리를 파고 커다란 항아리를 두세 개씩 묻어서 김장독을 삼았다. 겨울을 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였던 김장독을 묻기 위한 땅을 확보하는 게 주목적이었고, 그걸 봄 여름에 화단으로 삼은 것이어서 앞뜰의 활용도는 겨울철의 김장이 주였고 봄 여름의 화단이 부였는지도 모르겠다. 


아주 어렸을 때 살았던 이 후생주택은 정릉에 있었다. 지금 지하철 4호선이 지나는 길과 국민대학으로 가는 길이 교차하는 언저리였는데 복개하기 전의 정릉천이 흐르고 있었고 그 옆으로 한 동네가 다 비슷한 모양의 집으로 꾸며져 있었다. 그 옆동네는 규모도 더 크고 방이 많은 문화주택이 늘어서 있었다. 거실에서 정원으로 통하는 넓은 창문과 테라스, 처마 밑에 뚫어놓은 비둘기집은 그때도 참 낭만적으로 보였다. 그때는 낭만이라는 말은 당연히 모르고 그냥 멋있다, 동화 속에 나오는 집 같다 이렇게 느낀 것이리라. 그때 살았던 후생주택을 이미지로 검색해 보니 별로 없어서 그나마 찾아낸  흑백사진을 몇 장 기록 삼아 올렸다.


이렇게 지은 집을 전후의 서울 시민들, 그 가운데 중산층을 지향하는 계층이 모두들 각자 꿈을 가지고 아기자기 꾸미고 살았던 것이다. 당시에도 잘 살았던 사람들은 '적산가옥'을 개조해서 살았다. 그리고 지금 북촌이라 불리는 곳의 한옥마을처럼 제법 넓게 지은 한옥집 동네가 여기저기 생겨났는데 살림살이가 넉넉한 사람들이 그런 데서 살았다. 전국 이곳저곳에 '슬라브 이층 집 양옥'이 생겨나기 전의 일이다. 아래는 1961년도 영화 '돼지꿈'에 나오는 '후생주택'의 안과 밖 정경이다. 내가 살던 후생주택과 양식은 비슷한데 더 살풍경하다. 아마도 카메라를 들이대고 찍으려 마당이 트여있는 곳을 찾다 보니 그랬으리라 짐작해 본다. 



후생주택에 대한 이야기와 문화주택, 적산가옥에 대한 이야기는 기회 있을 때  다시 하기로 하고 육개장 이야기로 되돌아 간다. 나는 이날 이후에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엄마를 졸랐다. 빨간 콩나물국을 해달라고. 어머니는 끓인 뒤 고춧가루도 많이도 넣어보고 고춧가루를 넣고 끓여도 보고 나의 요구를 맞춰보려고 여러 가지로 시도를 하셨다. 


나는 아니야, 이게 아니야 계속 이게 아니라고 다른 걸 찾으니 어머니도 답답해하셨다. 세월이 흘러 어느 순간에 육개장을 먹다가 깨달았다. 바로 그때 맛있게 먹었던 '빨간 콩나물국'이 다름 아닌 육개장이었다고. 어머니는 집에서 육개장을 끓이신 적이 없으니 아마도 배달을 시키셨을 것이다. 그걸 목격하지 못한 나는 어머니가 만드신 집밥이라고 여겼던 것이고, 또 다섯 살 먹은 아이의 머릿속 식재료 데이터베이스에 고사리, 토란대 등이 들어있을 리 만무하니 콩나물, 밥, 빨간색 국물 그리고 뚝배기만이 남아서 그날의 육개장을 '빨간 콩나물국'으로 기억하게 된 것이었다. 그 뒤로 세월이 또 한참 흘러 언제부터인가 장례식장에서 내는 음식의 대표 메뉴 격으로 육개장이 등장을 하여 숱하게 먹을 기회가 생겼지만, 다섯 살 때 후생주택 마당에서 먹었던 그 육개장의 맛에 접근하는 걸작은 몇 차례 먹어보지 못했다. 


대학교 4학년 겨울, 친구 둘이랑 해남으로 내려가신 선배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사회적으로 알만하신 분이라 시외버스 터미널 부근 대문이 열려있는 커다란 집을 찾아 들어가 물었다. 아무개 선생님이 어디 사시는지 아시냐고. 마루 대청에 계신 어르신이 어디서 오셨는고? 하고 점잖게 물었다. 저희는 서울서 내려온 대학생들입니다,라고 간단히 자기소개를 하자 점심은 자셨는가? 밥은 먹고 다니셔야지, 하면서 알려줄 테니 식사를 하고 가소, 하면서 집사인듯한 사람에게 음식을 시켜오라 일렀다. 그때 얻어먹은 육개장이 내 생애 두 번째로 맛있는 육개장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해남에서 나름 유명한 목사님이셨는데 정치성향은 우리와는 정반대라고 하였다. 그래도 나는 아직 그 목사님에 대해서는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다.


보스턴에 가야라는 음식점이 있었다. 매사추세츠 스트리트와 보일스턴 스트리트 두 군데에 있었는데 도서관이 가까운 곳보다는 시내 보일스턴에 있는 가야를 애용하였다. 어느 날 그곳에서 우연히 시킨 육개장에 눈이 번쩍 뜨였기 때문이다. 옛날 바로 그 맛이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추억이라는 인센티브를 빼면 이 집이 맛으로는 아마 최고였을지도 모른다. 대파 대신에 리크를 넣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굵고 단 파가 잔뜩 들어있었고, 실같이 찢은 고기도 듬뿍, 당면도 고소, 아주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명품이었다. 몇 번 다니다가 주방장과 얘기를 나눌 기회도 있었다. 진한 호남 사투리가 미국이라 그런지 더 구수했다. 한 참 뒤에 다시 찾은 어느 날 육개장 맛이 변해서 물었다. 주방장님이 그만두셨다는 이야기였다. 어디로 가셨느냐고 물었더니, 서빙하는 이가 말을 흐렸다. 종합해보니 사랑의 도피행이라 행방을 아무도 모른다, 뭐 이런 이야기였던 것 같다. 종적을 감춘 육개장 명인의 행복을 빌었다. 이 세 군데의 육개장을 넘어서는, 아니 그 맛에 가까이 다가가는 육개장을 찾기 위해 나는 요새도 눈과 귀 그리고 입을 열어놓고 다니기를 멈추지 아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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