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대해 자주 말하는 친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것은 그가 하는 일과도 관련이 있다. 최근에도 10m 높이에서 떨어질 뻔했다고 말이다. 그는 일주일에 한 번 어떨 때는 한 달에 한번 죽음을 생각한다.
그가 죽음을 가까이한다는 점을 제외하면 친구로서 흠잡을 것이 없다. 그는 온순하고 배려심이 있고 유쾌하다. 그가 좋은 친구라는 점이 좋기도, 가끔 고통을 나누는 것이 부담스럽기도 하다.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 싱겁지만 영화 미키 17을 보고 난 뒤의 상상이다.
영화관에 SF영화를 보러 갈 때면 현실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걸 기대하다가도, 집에 와서는 영화가 반영하는 현실이 떠오르는 이유는 감독의 전작 영향이 있을 것이다. 봉준호 감독의 괴물이 무엇이고, 설국의 열차가 무엇이고, 옥자가 무엇일까 하는 생각말이다.
주인공의 이름을 내세운 미키 17에게 궁금해지는 건 죽음에 대해서다. 미키 17은 어떻게 죽어왔고 더 이상 죽지 않아도 된 걸까. 영화의 시작은 발을 헛디딘 미키 17의 실종이다.
실종은 봉준호 감독의 영화에서 핵심적이다. 살인의 추억에서 화성시 피해자, 괴물에서는 딸, 설국열차의 아이들, 기생충의 지하실남자는 실종된 사람들이다. 실종 사건 그 뒤에 국가시스템의 부조리, 사회적 약자에 대한 무관심, 자본주의의 탐욕, 빈부격차라는 것들이 있다. 영화의 주인공들이 실종자를 찾는 과정에서 사회의 부조리가 드러난다.
미키 17에서 다른 점은 실종자가 자신이라는 점이고, 그를 찾으려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에서 실종자를 찾으려 하면서 사회문제를 드러낸다면, 미키 17에서는 실종 후 살아서 돌아온 미키 17은 사람들로부터 숨는다.
미키가 목격하는 건 친구 티모가 자신을 희생양으로 삼는다는 것이고, 나아가 익스펜더블은 자신을 희생하는 직업이 아니라 희생당하는 직업임을 인식한다. 외계생명체를 희생시켜야 하는 입장에서 그가 해왔던 희생은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강제적이라는 것임을 깨닫는다.
봉준호 감독의 주인공들은 실종의 형태로 희생당한 이들을 마주한다. 주인공은 희생자를 실종으로 처리하는 이들과 시스템을 찾아낸다. 실종자의 행방불명은 타의적이며, 실종으로 처리된 희생자들이라고 말이다.
미키 17은 인류에 희생한다는 자각이 있었지만 스스로 실종자가 되고 희생자였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희생당한 자를 희생하는 자 혹은 실종자로 간주할 때 희생시킨 주체를 찾기는 힘들어진다. 죽은 희생자가 실종될 때 죽음에 대한 단서는 찾을 수 없고, 죽은 희생자가 스스로 희생했다고 할 때 희생의 주체는 그 자신이 된다. 두 경우 모두 희생시킨 이들은 모습을 감춘다.
오늘날에도 우리와 가장 가까운 나라에서 수 만 명이 타국의 전쟁터로 떠나고, 그들의 대부분은 실종으로 처리된다. 자신의 생명값으로 돈을 벌고 있다고, 자발적으로 희생하고 있다는 사람들의 인식은, 희생시키는 이들의 책임을 덜어 준다.
어느 밤에도 온몸을 무장하고 헬기에 몸을 싣고, 도시의 한복판에 내린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희생하는 쪽이었을까. 희생당하는 쪽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