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진 머리에 선택권은 없을 줄 알았지

by 온정

어려서부터 얼굴 피부도, 머리칼도 모두 지성이었다. 딱히 관리라는 걸 할 줄 몰랐던 학창 시절에는 특히 그 특징들이 도드라지곤 했다. 얼굴에 기름기는 가득한데 막상 수분은 부족해서 항상 피부가 좋지 않았다. 당시 기름종이가 유행했던 덕에 나는 매일 파란색 기름종이가 투명해질 때까지 얼굴을 꾹꾹 눌러대곤 했다. 하지만 기름종이가 기름만이 아니라 물까지 다 빼앗아간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그마저도 관두었다.

또 그 시절에는 주변에 앞머리가 없는 친구가 거의 없었다. 요즘은 앞머리를 길러서 옆으로 넘기는 사람들이 꽤 많지만, 당시에는 왠지 앞머리를 없애면 놀림감이 되기 일쑤였다. 게다가 그 나이에는 아는 세상이 워낙 좁아서였을까. 대부분의 아이들이 참 보수적이었다. 그래서 남들과 조금만 다르게 보여도, 혹은 조금만 다르게 행동을 해도 확 튀어 보이게 마련이었다. 심지어 남학생의 이름을 부를 때 성을 빼고 부르면 그 남학생을 좋아하는 거 아니냐며 놀림을 받기도 했으니까.

어쨌든 내가 중학생일 때에는 이마에 깻잎을 얹은 것처럼 풍성하게 앞머리를 내리는 스타일이 유행했다. 하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한줄기만 제외하고 모든 이마를 다 앞머리로 가려버렸으니, 앞머리가 없는 스타일이 생소했을 법도 하다. 나 역시 꽤나 큼직한 깻잎을 이마 위에 얹고서는 중학생 시절을 보냈다. 가끔 이미지 변신을 한답시고 앞머리를 일자로 만들어보기도 했지만 어울리지 않았다. 어차피 나의 변신에는 선택권도 별로 없었다. 옆으로 넘기는 앞머리, 일자 앞머리, 조금 짧은 앞머리 정도? 내 사전에 '앞머리 없음'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성인으로서 앞머리는 정말이지 귀찮은 존재이지 않을 수 없었다. 아침에 머리를 감아도 오후쯤 되면 나의 깻잎은 네 갈래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이마에 번지르르하게 올라오는 기름까지 앞머리에 묻으며 시너지 효과를 냈다. 조금만 지나도 삐죽 자라 버려서 다듬어주어야 하는 앞머리. 기름져서 갈라지면 신경 쓰여서 계속 만지게 되는 앞머리. 그럴수록 더 떡지는 앞머리. 으... 그렇지만 없어서는 안 될 애증의 앞머리.

앞머리가 없으면 큰일 나는 줄 알고 살아왔기에 대학생이 되어서도 앞머리를 고수하며 지냈다. 그러다 어느 순간 큰 맘먹고 앞머리를 기르기 시작했다. 이마를 드러내기 시작하자 지난 인생 동안의 앞머리가 무색할 정도로 주변 반응이 좋았다. 캠퍼스를 다니며 진작 없애지 그랬냐는 말을 몇 번이나 들었는지 모르겠다. 사실 앞머리를 없애면서 가장 좋았던 것은 관리를 안 해도 된다는 점이었다. 계속 미용실에 가기엔 억수로 귀찮았고, 혼자 자르다가는 종종 망쳐서 쥐 파먹은 앞머리를 가지게 마련이었는데... 내가 그동안 완전히 배제해버렸던 '앞머리 없음'이라는 선택이 이토록 좋은 결과를 불러올 줄이야.

앞머리가 없으니 한껏 편해졌으나 그 후에도 내가 계속해서 배제해온 선택지가 하나 더 있었다. 바로 '밤에 머리 감기'였다. 밤에 머리를 감으면 다음날 머리가 떡졌기 때문에 나는 매일 아침마다 머리를 감았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더우나 추우나 늦잠을 자나 매일 아침마다 긴 머리를 감고 말리는 일은 분명 보통의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꼭두새벽마다 머리를 감고 말리며, 나는 아침 시간이 너무나도 부족함을 느꼈다. 아침밥까지 꼭 챙겨 먹는 사람인지라 매일 눈을 뜨면 정신없이 집을 휘젓고 나서야 겨우 밖으로 나설 수 있었다.

그런 분주한 아침에 지쳐버린 어느 날 밤, 나는 전례 없는 시도를 해보기로 했다. 정말 못 봐주겠으면 아침에 다시 감더라도, 밤에 머리를 감아보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밤에 감으니 머리를 완전히 말리고 자야 해서 조금은 번거롭기도 했다. 하지만 머리를 감고 침대에 누울 때의 그 개운함, 그리고 다음날 아침의 여유....!!! 웬일인지 다음날 내 머리 상태는 생각보다 양호했고, 오후쯤 되면 조금씩 떡이 지긴 했지만 생각보다는 봐줄 만했다. (샴푸를 바꾼 덕일지도.)

결국 나는 매일 머리를 감기 시작했다. 머리 감는 시간만 바꾸었을 뿐인데 삶의 질이 한껏 상승한 듯한 기분을 만끽하고 있다. 아침 샤워를 하고 나면 추워서 호들갑을 떨며 급히 머리를 말리고, 여전히 물기가 남아 축축한 머리를 대충 패딩 모자 안에 숨긴 채, 밖에 나가면 머리카락이 딱딱하게 얼어버리곤 했던 지난날들... 매일 아침 세수를 하면서 바짝 말라있는 나의 머리칼을 볼 때마다 아직도 어색할 따름이다. 이렇게 편할 것을. 대체 선택권 없다던 사람 누구냐고 묻고 따지고 싶은 심정이다.

오늘도 내가 어떤 가능성을 습관처럼 배제했는지 생각해본다. 선택권이 없다는 말을 하기 전에, 제쳐놓은 다른 방안이 최선의 선택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잘 기억해두는 게 좋겠다. 몇 달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아침에 머리를 감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마냥 신기하기만 하다. 유독 추웠던 올 겨울 아침을 그렇게 나는 잘 보냈다.




커버 사진/ 필름 카메라 OLYMPUS PEN EE-3로 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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